일본 근대화에서 천황은 핵심적인 요소이다. 12세기 후반 — 고려의 무신정권과 동시대이다 — 부터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에 이르기까지 700년 가까이 무가정권武家政権이 실권을 쥐고 통치해왔던 일본은 19세기말 일본 주민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그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였던 천황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것을 중심으로 ‘국민’을 조직하였으며, 쇼와昭和시대에 이르면 거의 모든 국민이 (표면적으로는) 천황을 위해 죽을 각오를 다질 지경에 이르렀고, 아시아·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천황의 위력은 일본 국민의 내면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작동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천황의 위세가 절정이던 시기 일본제국의 전체주의를 가리켜 ‘천황제 파시즘’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한 규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전전戰前의 파시즘을 ‘미완의 파시즘’(가타야마 모리히데, 『미완의 파시즘』)이라 부르는 것도 ‘천황제 파시즘’ 못지않게 적절한 것이다. 일본 파시즘이 완성태에 이르지 못한 결정적인 요인도 천황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천황이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고, 일본제국군대는 천황의 군대였으나 메이지 헌법 체제와 정치적 관행은 천황중심의 일원적 권력 행사를 용납하지 않았다. 의도치 않은 듯하나 어쩔 수 없는 무책임성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패함으로써 일본제국은 붕괴하였다. 미완이었건 완성이었건 일본의 파시즘은 소멸되었다. 전전戰後 일본은 상징천황제를 채택하기는 하였으나, 전전과 결별하였다. 표면상 법률상 연속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한겹만 들추어 보면 전전과 전후를 연결하는 강력한 연쇄고리가 있다. 테크노크라트들이다. 이들은 근대 일본 지도자 3세대에 해당한다. 근대 일본의 지도자로는 메이지 유신 삼걸明治維新三傑이 우선 거론된다.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그들이다. 이어지는 세대에는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등이 있다. 이들 메이지 세대가 떠난 뒤에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같은 전문직업관료들이 등장한다. 이 책의 저자는 “테크노크라트(혁신관료)의 세계관과 이들 테크노크라트들이 수행한 직무상의 관심사 그리고 이들 간의 정치적 연계가 어떻게 파시즘으로 연결되었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 파시즘을 그는 “급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형태의 기술관료주의technocracy”인 ‘테크노-파시즘techno-fascism’이라 규정한다. 이는 “일본민족Japanese ethnic의 문화적·지정학적 우월성에 기반을 둔 생산적·계층적·유기적 국민공동체national community와 ‘공과 사의 융합’과 ‘자본과 경영의 분리’라는 원칙을 실현”하고자 하는 “군부와 관료 기획 기구들이 결합하여 테크노크라트들이 통제하는 ‘전체주의 국가totalist state’가 통치하는 새로운 권위주의적 통치모델이었다.” 이 개념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온 파시즘 개념과는 뚜렷하게 다른 것이며, 특히 일본제국시기의 파시즘을 규정하면서 천황이라는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데, 이로써 일본제국의 파시즘을 하나의 완성태로 이해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또한 테크노-파시즘은 테크노크라트를 일본제국 파시즘의 핵심 요소로 간주함으로써, 그리고 그들이 전전과 전후에 보인 연속성에 주목함으로써 전전후戰前後 일본 체제의 연속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를 내포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의 패배는 표면상의 단절일 뿐 전시 테크노크라트들이 등장하였던 1920년대 이래 일본이 동일한 성격을 유지한 체제임을 보이려는 듯하다.
일본제국의 테크노크라트들이 구상한 근대성은 자유주의, 자본주의, 계급론, 일본주의는 물론 좌익 인민주의, 사회주의적 국가기획, 민족주의 등 다양한 사상적 원천과 당대 독일의 산업합리화운동, 뉴딜 등과 같은 정책구상을 과학기술로써 융합한 ‘관리국가’ 또는 ‘경영국가’로 표상되었다. 이 구상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광역질서론을 배경으로 삼고 군부 통제파의 구상과 결합하여 만주국 건국으로 나아갔다. 만주국은 “머리가 사자, 몸뚱이가 양, 꼬리가 용인 괴물 키메라… 사자는 관동군, 양은 천황제 국가, 용은 중국 황제 및 근대 중국”(야마무로 신이치,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그것을 꿰는 것은 민간혁신관료의 통제전략이었다. 다시 말해서 만주국의 표면적 세 가지 구성요소를 작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원리는 “관료들의 ‘신징新京이데올로기’와 그들의 고차원적 ‘고도국방국가’라는 테크노-파시즘적 구상”이었던 것이다. 이 원리는 관료 기획기구, 관료적 대중동원, 관료적 통제전략을 통해서 실현되었다. “테크노-파시즘의 정치적·개념적 전략들은 우선적인 국가기획의 도입과 국가 주도 산업합리화의 추진, 그리고 만주국 건국으로 구체화”되었으며, 이는 “통제를 통한 자유의 성취, 조직을 통한 혁신의 창출, 공동체를 통한 자율성의 추구, 수직적 계층을 통한 지위의 향상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만주국에서 실현되었던 구상은 일본 본토로 들어와 1940년대 초반의 신체제운동으로 전개된다. 1940년에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이 발표한 ‘기본국책요강基本国策要綱’은 당시 혁신관료들의 구상을 잘 보여준다. 만주국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지휘아래 혁신관료들은 “계급의식을 민족의식으로 대체하여 전체주의적 관리국가를 만들고자”하는 계획들을 입안하였다. “만주국의 핵심 통치세력은 흔히 ‘2키 3스케弐キ参スケ’로 알려져 있다. 2키는 관동군 참모장과 헌병사령관을 역임했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와 만주국 총무처 장관을 역임했던 호시노 나오키星野直樹이며, 3스케는 만주국 총무청 차장과 산업부 차장을 역임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닛산과 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의 총수를 역임했던 아유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 만철의 총재를 역임했던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를 지칭한다. 1930년대 후반에 일본에 돌아온 이들 대부분은 일본 전시내각에서 최고위직을 역임했다.” 이들 중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의 전시 기획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기시는 일본을 테크노크라트적 초강대국technocratic superpower으로 만들려는 대담한 구상을 주창했다. 기시는 관리 능력과 전문 지식을 갖춘 지도자들만이 일본을 통치해야 한다고 확신했으며, 특권의식에 젖은 구 엘리트 인사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기시는 실용주의적 전문가인 동시에 군부 인사들과 재계 인사, 우익의 활동가 그리고 좌익의 기획가들을 함께 어울리도록 만드는 지칠줄 모르는 중재자였다. 기시는 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여러 집단들의 의견을 절충하는 안을 제시하고, 여러 의제를 둘러싼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중재할 수 있는 막후실력자였다.”
저자의 견지를 그대로 따르자면 전전은 테크노크라트들에게 구상과 시행착오의 시기였다. 저자는 테크노-파시즘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정치경제체제가 전전에는 실현될 수 없었음을 분명히 지적한다. “테크노크라트들은 재벌과 내무성, 천황 그리고 군부파벌의 힘을 극복할 수 없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사유재산의 원칙들을 수호하고, 대중의 정치동원을 제약하던 메이지헌법과 치안유지법에 있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나 대중정당 혹은 독재정권만이 보수주의자들의 저항과 관료들의 파벌주의, 군부의 파벌 간 대립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테크노크라트들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도, 대중들을 동원할 수 있는 감성적 호소나 물질적 유인책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남은 것은 테크노크라트들의 방식이 아니라 국민총화國民總和를 통한 총력전과 자기파멸의 가능성뿐이었다.” 전후는 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전후 관리주의로의 이행은 무엇보다 정치경제적 목표의 근본적인 전환”이었다. “고도국방국가를 향한 국가중심적 계획은 중산층 중심의 소비자 사회consumer society를 목표로 하는 사회중심적 계획으로 대체”되었고, “전후 국가의 성장 동력은 더 이상 군부나 군수 산업, 제국이 아니라 중산층과 민수 산업 그리고 국제교역이었다.” 목표와 계획과 성장동력이 전환되고 바뀌었으니 전시 테크노-파시즘은 소멸된 것인가? 아니 적어도 쇠락의 길로 들어선 것인가?
저자는 미합중국의 점령이 민간 테크노크라트들이 전후에 역할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했음을 지적하면서 “이와 더불어 1940년대 후반에 취해진 역코스 정책은 경제성장을 위해 전직 전시 테크노크라트의 전문지식에 크게 의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인적 구성의 연속성에서 구상과 정책 실행의 연속성을 추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매듭을 짓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1945년 8월 이루어진 일본의 항복을 전후한 몇 년을 제외한다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일본 테크노크라트의 기획의 관전사貫戰史는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전사는 단순히 전전의 관료들을 하나의 단일 세력으로만 보지는 않으며, 일본이 근대국가로 등장하기 이전에 장기간에 걸친 ‘관료주의’의 전통을 그 기저에 깔고 있다. 오히려 관전사는 작지만 영향력 있는 관료들이 일본 국가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근본적인 방법들에 집중하고 있다.”
인물의 연속성은 단연 기시 노부스케를 중심으로 한다. 그는 전후에도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총리대신을 맡았으며, 그 전에는 “자신이 가진 재계, 정치가, 관료들과의 광범위한 인맥을 통해 자유민주당 일당 지배라는 ‘55년 체제’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요시다로 대변되는 전후 보수 엘리트들로부터 중산층 전문가들에게로 권력을 이동시킴으로써 일본의 보수적 리더십을 전면적으로 탈바꿈시켰다.” 1993년에 붕괴된 ‘55년체제’가 구축되고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일본 보수의 리더십혁신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시기의 일본은 전전후의 연속성을 담지한 동일한 성격의 체제였는가. 그렇게 규정함으로써 저자의 의도대로 이 책이 “일본의 파시즘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파시즘 문제에 대한 학계의 재평가 노력에도 일정 기여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