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개미의 리더십
제가 리더십 강의를 안 하겠다고 버티고, 또 리더를 믿지 않는다고 얘기를 했더니, 당시 서울대 수강생 중에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하더군요. “교수님은 개미를 오랫동안 연구하신 걸로 아는데, 세상에 여왕개미처럼 강한 리더가 어디 있나요? 그걸 연구하셨으면서 리더를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참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중 상당수는 여왕개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막강한 리더라고 생각하시죠?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왕개미가 하는 일은 딱 하나입니다. 그냥 알 낳는 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알 낳는 일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차세대 국민을 생산하는 일이니까요. 여왕개미가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왕개미가 절대로 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나라의 대소사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일개미들이 알아서 합니다. 개미 나라에는 노사 문제라는 게 아예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측이 없거든요. 노측에서 다 알아서 합니다. 제가 평생 개미를 관찰하며 그런 조직을 연구한 셈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굳이 리더가 있어야 한다면 여왕개미 같은 리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차세대 국민을 생산하는 일만큼 중요한 건 없지요. 그러니 나라의 근간을 붙들고 있는 존재는 역시 여왕개미가 맞습니다. 조직의 가치나 목표는 확실하게 붙들어 매되, 실제로 이루어지는 온갖 대소사에는 일일이 관여하지 않고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완벽한 리더는 이렇게 독단적이지 않은 리더입니다. 한 개인이, 한 개체가 지식을 알면 얼마나 많이 알겠습니까? 그런데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전횡하다보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훨씬 많거든요. 여왕개미처럼 일개미들에게 일임하지는 못하더라도 모든 문제에 대해 홀로 설명하고 결정하는 리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오래 살다 왔는데요. 미국에서 과학자로 살면서 제일 아이러니한 게 뭐였냐면, 미국 근대사에서 과학자들이 제일 못마땅해했던 대통령이 지미 카터Jimmy Carter였고, 제일 좋아하는 대통령이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었다는 겁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영화배우 출신이잖아요. 과학의 ㄱ자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훌륭한 과학자들을 모셔놓고 “난 과학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요. 잘 알아서 해주세요” 하고는 믿고 맡겼습니다. 그렇게 맡겨놓은 후 절대로 과학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죠. 한편 카터 대통령은 조지아공대에서 공부했거든요. 스스로 과학 분야를 좀 안다고 생각해서 사사건건 개입하다가 미국 과학계를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선의를 가지고 잘 이끌어보려 한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과학자들의 집단지성을 믿고 맡긴 레이건 대통령이 훨씬 더 훌륭한 업적을 이뤄낸 겁니다. 이 사실은 참 역설적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자기 마음대로 12·3계엄을 일으키고 끝내 탄핵된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과학계를 초토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과학 카르텔’을 운운하면서 개입했고, 연구비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바람에 우리나라의 많은 훌륭한 연구자들이 전부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다른 온갖 실정보다도, 저는 과학자로서 이 점을 정말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는 사실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서 연구 생활을 이어가려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3년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Nature’에서 한국 과학기술에 관한 특집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표지에 아예 “한국 과학기술에 동이 텄다”라는 한글 제목까지 내건 기사였습니다. 그 기사에서 세계 과학자들은 응용과학의 지원은 대기업에게 맡기고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하는 국가 연구비는 온전히 기초과학에 투자하라고 우리 정부에게 조언했습니다. 저는 그 학술지를 손가방에 넣은 채 이듬해인 1994년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도 거의 대부분의 연구비를 응용과학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전체 연구비 규모가 늘면서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비 사정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과학자들이 소박한 기대감을 키우고 있었는데, 과학 연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국가의 지도자가 하루아침에 그동안 애써 구축한 시스템을 무참히 무너뜨린 겁니다. 학문과 연구 시스템은 구축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무너뜨리는 일은 순식간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리더의 중요성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는 걸 뼈아프게 경험한 사건이었습니다.
인간 사회의 정치 지도자인 대통령은요, 여왕개미처럼 고유한 역할이 있는 자리입니다. 필요한 큰 그림을 그리고, 방향을 제시하고 흔들림 없이 미래를 구상하고,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자리이지요. 리더를 한 번 잘못 선출해놓으면 몹시 오랫동안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망가뜨리려 들면 많은 것을 없애버릴 수도 있는, 무서운 권력을 가진 자리라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여왕개미의 리더십이란, 철저하고 확실하게 가치나 목표를 붙들고 있되 실제 일의 진행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방식을 취합니다. 개미 사회에서 일 전문가는 일개미들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왕개미는 일개미들이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사사건건 관여하지 않고 맡겨둡니다.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신뢰하고 위임할 줄 압니다. 한발짝 뒤로 물러나서 지원을 해주면 책임을 맡은 여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활동하면서 이른바 집단지성을 이뤄내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모든 걸 다 독단적으로 마구 해치우지 않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연에서 배워야 할 탁월한 리더십의 한 가지 면모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름지기 탁월한 리더는 전문가들을 신뢰하고 그들의 고견을 청해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풍부한 경험 덕택에 업무의 자초지종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더라도 늘 현장의 실무진과 논의하며 함께 풀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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