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눈이 내리다
눈발이 짙어지자 나는 고래가 죽었나 보다 생각했다.
고래가 죽으면 눈발이 짙어진다. 고래의 죽음은 이 어둡고 춥고 적막한 마을에 내리는 생명의 찬가다. 나는 기쁨에 파르르 떨며 콧잔등에 매달린 발광포에서 짙은 초록빛을 뿌렸다. 그러고는 굳은 아가미를 쭈욱 펴며 짙은 눈보라 사이를 부유했다.
「고래는 아니야. 텁텁해.」
반려가 생각을 전했다.
반려는 요새 지능이 급격히 떨어졌다. 나와 결합한 이후로는 입이 빨판으로 변하고 눈과 뇌 일부도 녹아내려, 말도 못하고 간혹 생각의 파편만을 전할 뿐이다. 혈액마저도 나와 같이 순환하는 지금, 반려는 내 몸에 달려 덜렁거리는 하나의 기관에 불과하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 삶, 늘 꿈꿔왔던 사랑의 결실이건만, 때로 나는 이 결혼 생활이 우리가 사랑했던 흔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 사랑, 고래는 아닌 것 같아……」
고래는 물에 퉁퉁 불고 윗동네 물고기들에게 너덜너덜 뜯기면서도, 그 오동통하고 야들야들한 살집이며 쫄깃쫄깃한 지느러미와 뜨끈뜨끈한 피며, 보들보들한 눈알과 쌉싸름한 아가미를 이 심해까지 다 갖고 내려온다. 몇 달은 마을 전체의 풍요로운 양식이 될 뿐 아니라, 살이 다 발라진 뒤에도 좀비 벌레들이 그 두툼한 뼈에 달라붙어 지방을 빨아 먹으며 자라나 번식하여 새로이 우리의 식량이 된다.
「내 사랑, 한시도 멈추지 않고 떠드는 내 수다쟁이, 고래는 아니라니까…….」
반려의 생각을 귓등으로 흘리며 나는 신의 계곡으로 헤엄쳐갔다. 신의 계곡은 몇 해 전 해저화산이 터지며 생겨났다. 뜨듯하게 끓는 열수구에서 관벌레와 게와 새우가 산호처럼 피어났다. 그들은 짧은 풍요 속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는 화산이 식으며 함께 고요히 종말을 맞이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 지내기 좋은 곳일 뿐만 아니라, 남은 주검과 그 주검을 먹는 벌레들이 계속 양식을 제공하는 곳이라 우리가 여기를 중심으로 새 마을을 꾸렸다.
계곡에 이르니 친구들이 한데 모여 기쁨의 춤사위를 나누고 있었다. 평상시 우리는 거리를 두고 지낸다. 먹을 것이 부족한 가난한 동네에서 서로의 입에 들어가는 것을 빼앗지 않으려면 어쩔 도리가 없다. 움직이는 일도 체력의 낭비라, 우리의 일상이란 해류에 몸을 맡기며 떠다니다 콧잔등에서 반짝이는 발광포를 먹을 것인 줄 알고 온 작고 굶주린 것들을 입을 벌려 삼키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처럼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이면 우리도 한데 모여 축제를 벌이지 않을 수 없다.
큰니고기312가 반려 둘을 달랑거리며 다가왔다. 큰니의 반려 중 하나는 아직 뇌가 남아 있어 대화를 나누지만 다른 하나는 얼굴이 몸에 완전히 파묻힌 뒤로는 정자만을 생산할 뿐이다.
“나무수염아귀1029, 내 반려 말이 고래는 아니라더군.”
크니는 크고 툭 불거진 눈을 뒤룩이며 위턱과 아래턱을 감싼 길고 날카롭고 무수한 이빨을 따닥였다. 우리 모두가 어둠 속에서도 앞을 볼 수 있는 큰 눈과, 한번 입안에 들어온 먹이를 놓치지 않도록 덫이나 다름없는 날 선 이빨을 갖고 있지만, 큰니의 이는 과한 편이다. 어찌나 크게 자라는지 나이가 들면 제 이에 찔려 입을 움직이기도 어렵다.
나는 발광포를 반짝이며 말했다.
“내 반려도 그러더군. 하긴, 고래라면 슬슬 몸이 보일 때가 되었지.”
“기다려보자. 저녁이면 탐험가들이 소식을 가져오겠지.”
우리가 말하는 ‘탐험가’는 샛비늘치다. 그들은 이 심해에서부터 저 ‘수면’이라는 사상의 수평선까지 매일 목숨을 걸고 순회하는 용맹한 가문 중 하나다. 수면은 온갖 이름 모를 괴물이 출몰하는 곳이다. 하지만 샛비늘치들은 매일 젊은이들의 귀한 목숨을 희생하면서도 순회를 멈추지 않는다. 수면에서 먹는 음식의 맛은 심해와 비할 바가 아니며, 무엇보다는 수면 위로 뛰어올랐을 때 접하는 황홀한 풍경은, 한 번이라도 보면 다시 가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것이다. 그 너머는 새하얗고, 찬연하고, 심해의 모든 빛을 합한 것보다 밝고 영롱하다고 한다. 큰니는 산소 부족과 낮은 수압이 가져오는 환각이라고 비웃지만…….
더 못 믿을 이야기는 그 ‘수면 너머’의 너머에 ‘구름 너머’라는 또 다른 사상의 수평선이 있고, 그 너머는 또 이 심해처럼 춥고 적막하고 어두운 세계라는 가설인데……. 거기까지 가면 내 머리로는 가늠이 가지 않는다.
“바람이 멈추지 않아.”
저 아래에서 음침한 빛이 반짝였다. 털아귀042다. 태어난 이래 모래 바닥에서 한 번도 움직여본 적이 없는 친구다. 털아귀의 몸에는 제 몸뚱이의 열 배나 긴 아름답고 부드러운 털이 수십 가닥은 뻗어 있다. 성감대처럼 예민한 털은 해류의 미묘한 방향 변화와 기온 변화를 탐미하듯 잡아낸다. 한창때 털아귀는 대양 전체의 움직임도 감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새는 살짝 노망이 났는지 이상한 말만 한다.
“바람은 원래 멈추지 않잖니, 친구야.”
큰니가 부드럽게 대꾸해주었다. 우리가 아는바, 수면 위도 물살처럼 흐른다.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찬 곳에서 더운 곳으로, 더운 곳에서 찬 곳으로. 그것이 바람이다.
“바람이 멈추지 않아. 세상 끝에서부터 끝까지 계속 불고 있어. 벌써 오래전에 멈췄어야 했는데……. 날이 더워서야. 바람이 더워서 미친 게지.”
“털아귀는 정신이 이상해졌어.”
큰니가 털아귀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내게 몰래 빛을 뿌리며 속삭였다. 이 고요한 세계에서 우리는 보통 발광포가 내뿜는 빛의 모양과 반짝이는 간격으로 대화한다.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씩은 움직이며 살라고 내가 전부터 그렇게 말했는데.”
“바닥에 가라앉은 저 나쁜 것들 때문일 거야.”
내가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이 마을에도 눈송이 외에도 다른 것이 쌓인다. 썩지 않는 것들, 좀비 벌레마저도 먹지 못하고 토해내는 것들. 영양도 없고 소화되지도 않고, 파도에 아무리 부서져도 작아지기만 할 뿐 없어지지 않는 것들. 어린아이들이 눈송이인 줄 알고 삼켰다가 토하지도 싸지도 못하고 배가 빵빵하게 터져 죽고 마는 것들이다. 지금은 아가들이 아예 저것들을 몸에 박은 채로 태어나기도 한다.
“가엾게도 나쁜 걸 너무 많이 먹은 거지.”
털아귀는 전부터 이상한 말을 했다. 바다가 싱거워졌어싱거워지다니?, 많아졌어, 무거워졌어, 더워졌어……. 아, 더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만큼은 우리도 느끼고 있으니. 어디에선가는 수만 년이나 굳건했던 얼음 대륙마저 녹았다고 하니.
“눈이 여기만 내리는 게 아니라는구나, 얘들아.”
관해파리 씨가 우리 사이를 지나치며 몸 전체에서 부드럽고 우아한 빛을 뿌리며 말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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