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부적절한 명제가 낳은 부적절한 결론
삼단논법이 우리를 한 방 먹이는 법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중세 시대에 교황이라는 지위는 조지 R.R. 마틴George R.R. Martin의 소설 뺨치는 정치 음모가 파다한 자리였다. 그러나 초기 바티칸에서 일어난 음모처럼 괴상한 기준으로 봐도 897년 1월에 일어났던 사건만큼 드라마틱하고 기이한 사건은 가톨릭 역사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다. 장엄한 산 조반니 라테라노 대성당 법정에서 새로이 교황으로 선출된 스테파노 6세Stephen VI는 전임 교황 포르모소Formosus의 위증과 부패, 죄악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전 교황 포르모소는 자신을 향한 장황한 독설과 격렬한 공격에도 냉랭한 침묵을 지켰다. 전 교황의 침묵은 어쩌면 당연했다. 포르모소는 재판이 시작되기 8개월 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무덤에서 꺼낸 포르모소의 시신은 교황의 제의를 입혀 의자에 기대어 앉혔고, 부제는 당혹스럽게도 죽은 교황을 대신해 답변해야 했다. 포르모소교황 명은 다소 공교롭게도 ‘잘생긴’이라는 뜻이다. 죽은 지 오래된 시체에는 적절하지 않은 별명이다는 반항적인 태도로 침묵을 지켰지만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교황을 고발한 자들은 이 침묵을 유죄의 증거로 인정했다. 결국 스테파노 6세는 죄 없는 자만이 자신을 변호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포르모소는 고발된 일들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이 논리에 따르면 유죄가 틀림없었다. 이렇게 포르모소의 죄는 드러났고, 스테파노 6세는 곧바로 이미 죽은 교황을 비난하고 그가 축복을 내리지 못하도록 시체의 오른손 손가락 세 개를 자르면서 어쩌면 포르모소 재판이 자신의 빛나는 업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희망을 품었다.
훼손된 채 거친 티베르강에 던져진 포르모소의 시체를 수도사들이 수습하자, 로마 시신들은 잠시 기적을 숭배했다. 끔찍했던 정치 쇼는 시체 시노드 혹은 시체 종교 재판으로 불렸으며 여론은 이를 계기로 교황 스테파노에게서 돌아선다. 물론 스테파노 6세는 정말로 멍청이는 아니었고, 이 재판은 그저 노골적인 정치 쇼였다. 이 추악한 사건은 왜곡된 논리로 합리화되었고, 아무런 정의도 찾을 수 없는 이 사건을 이성적으로 보이게 치장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스테파노 6세가 자리를 오래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897년 여름이 지나기도 전에 스테파노 6세는 구금되었고 자신의 방에서 목이 졸려 죽었다. 교회는 후에 포르모소의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 즉 기록말살형이 경건함보다는 정치에 따라 행해졌다는 점을 무시했고, 현명하게도 이 추한 사건이 시간의 무게에 눌려 빨리 사라지게 놔두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뒷받침하는 매혹적인 교훈은 남아 있다. 바로 이성에 대한 환상이 우리를 얼마나 잘못된 길로 이끄는가다.
완전해 보이는 이성의 불완전성
이성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명확한 특징이다. 인간은 사고하는 동물이며 메타인지 능력의 축복을 받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 개개인은 추상적 개념과 유형적 개념 모두와 악전고투하며,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미래를 대비한다. 이 모두를 뒷받침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며 가장 짙은 어둠이 다가올 때도 빛을 밝히는 불꽃이다. 이렇듯 인간적인 특징이 있지만 인간의 뇌는 절대 실수하지 않는 기계가 아니며, 우리는 종종 명백한 혹은 미묘한 실수를 저지른다. 심리학자 리처드 E. 네즈빗Richard E. Nesbitt과 리 로스Lee Ross는 이렇게 두드러진 모순을 가리켜 “철학의 오래된 역설 중 하나는 인간 마음의 위대한 승리와 놀라운 실패 사이의 명백한 모순이다. 인간이라는 생물은 가장 강력한 컴퓨터도 해결하기에 너무나 미묘하고 복잡한 추론 문제를 일상적으로 해결하면서도 매일의 간단한 판단에서는 종종 실수를 저지른다”라고 말했다.
강력한 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뇌를 충분히 훈련해서 미묘하고 복잡한 상황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대충 컴퓨터에 비유해보자면, 하드웨어가 최고급 사양이더라도 적절한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컴퓨터는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뇌 구조와 복잡성은 무엇보다도 뛰어나지만, 추론은 직관을 넘어서므로 학습이 필요하다. 불완전한 추론은 완전히 그릇된 결론에 이르는 길이다.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라는 컴퓨터 과학자의 진언은 오래전에도 있었다. 컴퓨터의 아버지라 불리는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는 1800년대 중반에 “‘배비지 교수님, 기계에 틀린 숫자를 넣어도 맞는 답이 나올 수 있나요?’ (…) 나는 이런 질문을 떠올리는 뒤죽박죽인 사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한탄했다.
물론 인간은 컴퓨터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깊이 사고하면서도 어떤 때는 직감에 따라 빠르게 결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위험과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어떤 것이 위협인지 가늠할 수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이 경험 법칙을 휴리스틱heuristics, 제한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직관으로 판단하는 의사 결정 방법.―옮긴이이라고 한다. 이런 지름길은 항상 들어맞거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상황에 적용하기에 ‘적절하고’ 상대적으로 인지에 에너지가 많이 들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점은 휴리스틱이 거의 본능적이어서 사고 과정이 특정 결론으로 향하는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충동을 잘 활용해서 종종 빠른 결정이 생사를 가르기도 하는 선사시대 수천 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는 중요한 결정은 대부분 더 미묘한 사고가 필요하다. 휴리스틱은 유용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도전과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근본적으로 부적합하다. 해결할 문제가 지정학이든 건강관리든, 무의식적인 본능이 판단을 내리도록 할 수 없으며,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반사는 재앙에 이르는 왕도다. 오늘날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는 대부분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고 간단한 해결책이 있지도 않다. 오히려 다양한 명도의 회색지대에 존재하며,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마주한 중요한 문제들은 뚜렷한 최적의 해결책이 없으며, 새로운 정보를 참고해서 고찰하고 검토하며 결정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는 무조건 반사와 배짱 말고도 분석적으로 사고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논리와 상상으로 결론에 이르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결정하고, 길을 선택하며, 미래를 계획하면서 일상에서 이 능력을 항상 사용한다. 그러나 논리와 이성에 자부심을 느끼더라도 실수에는 면역이 없다. 잘못된 사고는 오랫동안 인간을 괴롭혔고 논리의 결함은 해결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군다나 이성에 대한 환상 때문에 구조적인 오류로 무너질 주장을 오해한다는 증거가 아주 많다. 이에 따르는 대가는 정치부터 의학까지 다양한 영역에 이르며, 인간과 세계는 학대나 고통, 손상 등의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학계에서만 나오는 우려가 아니다. 경이로운 인간의 마음은 지금의 인간이라는 위치를 향해 달려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형편없는 이성의 변덕에 괴로워한다. 이 오류를 수정하려면 우리가 실수하는 지점을 파악해야 한다. 오늘날 인간이 마주하는 문제는 사소하지 않으며, 우리는 계속 복잡한 문제와 씨름하면서 치료법부터 정부 정책까지 모든 것의 위험과 이익을 끊임없이 가늠한다. 인간이라는 종으로서는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기후변화의 유령부터 전염병, 세계 분쟁까지 기념비적인 실존 문제에도 직면했다. 인간의 사고 능력은 이런 공격에 맞서 실용적이며 건설적인 해결책을 찾을 유일한 기회이며, 이 문제와 함께 다른 문제들도 해결하려면 불완전한 사고력을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굳건한 이성과 수상쩍은 모조품의 정확한 차이점은 무엇일까?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