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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 시작해 볼까요?
자서전.
아마 많이 들어 보셨을 거예요. 자서전이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에 관해 쓴 글이죠. 어떤 사람들이 이런 걸 쓸까요. 그렇습니다. 전직 대통령. 전쟁 영웅. 성공한 기업인. 위대한 학자. 종교 지도자. 불굴의 영혼. 말하자면 벤저민 프랭클린, 김우중, 헬렌 켈러, 마하트마 간디, 미셸 오바마…… 같은 사람들이죠.
영어로는 오토바이오그래피라고 부릅니다. 칠판을 한번 보세요. 세 개의 단어가 들어 있죠. 오토auto. 바이오bio. 그래피graphy. 오토는 자기 자신, 바이오는 삶, 그래피는 쓰는 거죠. 말 그대로 풀어 보면 자기가, 삶을, 쓰는 것. 이것이 자서전의 본래 뜻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자기가, 삶을, 쓰는 것. 사실 이건 자서전만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은 실은 자기가, 삶을, 쓰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자서전은 백만장자 CEO나 유명 정치인, 특별하고 대단하고 빛나는 삶을 살았던 사람만이 쓰는 그런 글이 아닙니다. 어떤 글이든 우리가 쓰는 글들은 일종의 수정된 자서전이에요.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은.
2
2017년 8월 5일, 나는 서울 강남구 언주로의 병원 5층 복도에 앉아 있었다. 막 8시를 넘긴 토요일 저녁이었고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원에 도착한 지 꼭 열다섯 시간째. 새벽 4시에 전통을 시작한 아내를 차에 태워 병원으로 달려왔을 때만 해도 오늘 하루가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열여섯 시간의 진통 끝에도 아이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의사는 수술을 권유했다. 더 지체하면 산모도 아이도 위험해질 수 있어요. 번갈아 아내 위에 올라타 분만을 돕던 간호사 둘은 기진맥진한 것처럼 보였다. 어때? 내가 묻자 누워 있는 아내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의사와 나는 잠시 분만실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내민 수술 동의서에는 무서울 말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출혈. 감염. 혈종. 자궁무력증. 양수색전증. 2차 수술. 합병증. 장폐색. 호흡곤란. 저산소증. 사망.
“괜찮을까요?”
마지막 단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가 묻자 의사는 펜을 건네며 답했다.
“나중에 비키니 입을 수 있게 해 드릴게요.”
보호자 서명을 하고 나니 간호사가 이제부터는 나가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수술에 필요한 인원들이 수술실로 속속 모여드는 것을 보며 나는 병동을 빠져나왔다. 따로 대기실은 없어서 복도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병원 로고가 새겨진 눈앞의 회색 자동문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밤을 새운 탓인지 머리가 몽롱했다. 자동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일과 소망.
인생이란 고약한 농담을 즐기는 친구 같아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기치 못한 표지를 과거로부터 길어 올려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너, 이거 아직 기억하니? 하고 묻는 것처럼.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맥베스」의 대사를 떠올리던 2012년의 여름에도 나는 그 단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은 날마다 아주 느린 속도로 기어가 기록된 마지막 음절에 다다른다는 그 대사에서, 셰익스피어가 쓴 ‘마지막 음절’이란 구절의 원래 뜻은 죽음이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나의 ‘세월의 책’에 기록된 마지막 음절은 과연 뭘까?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 몇십 분이 나에게는 영원히 흐르지 않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어두운 핸드폰의 표면을 만졌다. 8시 35분. 8월 5일 토요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내 아이의 첫 울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메모 앱을 열어 아이가 세상에 온 시간과 날짜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른 「리어왕」의 대사, “우리가 태어날 때 우는 건 바보들의 거대한 무대에 오게 되었기 때문이야.”를 이어서 급하게 타이핑하려는 순간, 눈앞의 ‘내일과 소망’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3
한국에 다시 돌아온 것은 2013년 1월이었다. 공항에는 아버지와 지혜가 나와 있었고 우리는 별다른 말 없이 인천에 있는 엄마의 납골당으로 향했다. 사진 속 엄마는 너무 환하게 웃고 있어서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고등학교 친구들과 떠났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분홍색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노란색 손수건을 목에 매고, 알이 지나치게 커 보이는 갈색 선글라스를 낀 엄마. 저마다 알록달록한 색색의 옷을 입었음에도 엄마와 친구들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게 보였다. 이들 중에도 엄마를 여인숙이라고 불렀던 친구가 있을까?
‘여민숙 권사’라고 새겨진 유골함 옆에는 묘비혹은 그 비슷한 것 대신 쪽지 같은 것이 놓여 있었는데, 거기엔 엄마가 생전 가장 좋아하던 성경 구절이 누군가의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 잠언 16장 9절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눈을 감고 엄마를 떠올려 보려 했지만 왜인지 잘 되지 않았다. 방금 본 성경 구절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사람이…… 길을…… 계획할지라도. 사람. 계획. 길. 결국 세 단어가 남았다. 엄마의 계획은 뭐였을까? 엄마의 마음에는 어떤 길이 펼쳐져 있었을까? 나는 엄마가 산티아고 길을 걷는 장면을 상상했다. 엄마의 걸음걸이, 엄마 발에 차였을 모래, 뺨을 스치는 건조한 공기, 시원한 물을 떠올리게 하는 갈증, 리드미컬하게 반복되는 가쁜 숨소리 같은 것들이 어둠 속을 하나둘 채워 나가다가 어느 순간 쨍, 하고 깨졌다. 나는 그 조각들을 주워 모으려 했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어둠 속에는 나뿐이었다.
눈을 뜨고 이제 그만 가자고 말하려 했을 때 지혜는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차에 있겠다던 아빠는 뒷자리에서 잠들어 있었다. 창문을 두드렸더니 아빠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숨을 뱉으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바람이 매서웠고 배가 고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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