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훗카이도대학에 근무하던 시절, 나는 작은 공부 모임에서 이 책의 제1장, 제2장에 해당하는 내용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때 철학자인 오쿠야마 지로奥山次良 선생이 “일본의 사상사는 사상사로서의 좌표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평가받아 왔지만, 지식을 종합하거나 편성하는 방법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무언가 일본 사상사의 질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시도해보지 않겠습니까?” 하며 감상을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토교 淨土敎의 사상에 대해 『왕생요집往生要集』과 『선택집選擇集』 그리고 『교행신증敎行信證』 세 권의 책을 중심으로 그 편성 체제를 비교하면서 추적해보겠다고 생각했다. 오쿠야마 선생이 젊은 나이에 돌아가셔서 안 계신 지금, 문외한의 질문에 진지하고 친절하게 대답해주시던 선생님께 더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사상사나 문화사의 영역은 현대에도 의의를 지니는 문화유산 또는 뛰어난 사상가나 작가의 저술과 작품이 남아 있어 여러 가지 연구가 시도되었지만, 오히려 그런 연유로 문화 창조와 관련한 인물의 전기나 작품만을 주로 연구하는 경향을 띠었다. 이는 당연한 현상이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상가나 예술가, 하나하나의 고전이나 조형물 등에 대한 연구가 다양한 시점에서 이루어진 결과, 셀 수 없을 정도의 연구 성과가 있음에도 그것들의 상호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사상가나 예술가 또는 여러 가지 문화유산의 자리를 찾고 지위를 매기려고 해도 좀처럼 실마리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정치사에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과 정치제도가 있어 이를 중심으로 연구를 추진하면 되고, 경제사에는 생산이나 유통 구조를 밝히려는 목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상사나 문화사의 문제를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공통 화제나 연구의 좌표축으로 삼을 만한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현재까지는 일반적으로 사상사나 문화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관심에 따라 대상을 선정하고, 인물의 내면에 대한 이해나 작품의 해석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에 머물렀다. 따라서 각각의 논자·독자의 관심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기만 하고, 좌표축이 없는 상태로 논의가 단순 반복되어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고 논의를 더욱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인물의 평가나 작품의 해석에 대한 논의를 더욱 다양하게 넓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한 사회에 존재하는 사상이나 문화를 구조적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시도의 하나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는 사상이나 문화의 측면에서 지식의 집대성과 전달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회가 성립되고 유지되려면 여러 가지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하고, 또한 그것을 전달해야 한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책에서는 문자와 관련이 있고 책의 형태로 확산된 부분에 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나는 이 문제를 특히 유서類書1), 즉 백과사전적인 것들을 통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백과사전적인 책을 읽다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지식의 범위나 사유방식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많다. 문자로 쓰여 책으로 전해진다는 제한은 있지만, 나는 백과사전적인 것을 만들어낸 정신의 계보와 백과사전적인 책의 세계를 더듬어가면서 사상이나 문화의 역사를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좌표를 찾아 확인해보고 싶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집적되고 정리된 지식과 정보 전체를 살펴보면서 그중에서 『원씨물어源氏物語』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신란親鸞2)이 짊어진 사상사적인 과제는 무엇이었는가, 다도의 미의식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등등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작업을 위한 작은 시도의 한 부분이다.
* 주
1) 과거에 중국에서 여러 책들을 내용이나 항목별로 분류한 결과를 모아 편찬한 책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의 백과사전과 유사하다.
2) 가마쿠라 시대 전반부터 중기에 걸쳐 생존했던 일본의 승려로 정토진종의 종조로 삼는다. 생몰년은 1173~1262년이다.
메이지 문화사의 절정 - 『일본백과대사전』
백과대사전의 편찬
1908년 8월, 산세이도三省堂에서 간행한 『일본백과대사전日本百科大辭典』 제1권은 러일전쟁 후 국가 의식이 높아지는 가운데 조야朝野 인사들의 주목을 끌었다. 작은 활자로 빼곡하게 메운 3단 구성의 판면은 신시대 독자들에게 세계의 모든 지식을 모았다는 실감을 안겨주었으며, 정교한 도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근대적인 학문의 세계를 접하는 기쁨이 솟아오르는 듯했다. 큰 판형에 1300쪽에 이르는 서책의 중량감은 책을 손에 든 사람들에게 백과‘대’사전을 실감나게 했다. 『일본백과대사전』은 대형책 6권에 색인 1권이 더해진 구성이었다. 세계 강국에 맞서 승리한 일본은 드디어 백과대사전도 가지게 되었다. 이는 20세기 초 일본 문화의 발전에서 말 그대로 쾌거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산세이도의 주인 가메이 다다카즈亀井忠一는 에도의 고이시카와小石川 출생으로, 18세 무렵에 나막신 가게를 시작했지만 문명이 개화하는 세상에 맞춰 간다神田에 헌책방을 열고 『라이트 씨 평면기하학교과서The Elements of Plane Geometry』의 출판을 시작으로 근대 일본 출판업의 선구자가 된 사람이다. 가메이 다다카즈의 산세이도가 출판사로 발전하게 된 토대는 1888년 9월에 간행한 웹스터의 신간 대사서 『화역자휘和譯字彙』였다. 이 사서가 신시대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이용되면서 산세이도는 경영의 기초를 다졌다.
『화역자휘』의 성공은 가메이 다다카즈의 출판인으로서의 혜안과 함께 실제로 사서 편찬 작업을 맡은 사이토 세이스케齋藤精輔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사이토 세이스케는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뒤 19세의 나이에 뜻을 세우고 상경해 모오리毛利 공작 가문의 가정교사를 하는 한편, 가메이의 간청을 받아들여 영일사서의 편찬에 참여했다. 젊은 사이토의 노력으로 정리된 이 사서는 이스트레이크Frank Warrington Eastlake·다나하시 이치로棚橋一郞 편으로 간행되어 성공을 거두었는데, 타고난 편집자였던 사이토는 시간을 두지 않고 곧바로 편집 과정에서 발견한 것을 되살려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사이토가 영일사서 편찬 과정에서 절실하게 느낀 점은 번역어의 결정 작업은 전문가의 지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영어에 능통한 인물뿐 아니라 뛰어난 전문가의 협력을 얻는 것이 곧 좋은 사서를 만드는 열쇠라고 생각한 사이토는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문학), 하토야마 가즈오鳩山和夫(법학), 다쓰노 긴고辰野金吾(공학), 마쓰무라 진조松村任三(이학), 미노사쿠 가키치箕作佳吉(이학), 미야케 히이즈三宅秀(의학) 등 당시 최고의 신예 학자들의 지원을 받아 『화역자휘』의 개정에 성공했다. 실제로 그들은 그 후 일본 학계를 짊어진 쟁쟁한 인물들이다. 또한 사이토는 영일사서의 성공을 토대로 일영사서도 만들기 시작했는데 1892년 4월, 도쿄 간다의 대화재로 산세이도가 남김없이 타버리는 바람에 고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자료와 원고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 사이토는 『화역자휘』 편집에 전념했던 몇 년의 경험을 되살려 새로운 사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영일사서를 개정할 때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학자들을 중심으로, 신시대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전문용어에 간결한 해설을 덧붙인 사서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애초에는 전 1권으로 작은 규모였지만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전문용어집을 편찬하려던 계획이 신진기예新進氣銳의 학자들과 젊은 편집자들이 힘을 합쳐 실행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점점 더 확대 발전하게 되었고, 그들의 꿈이 더욱 부풀어 올라 결국 ‘백과사전’이 되었다.
국력의 상징
가메이는 사이토가 중심이 되어 구체화한 계획을 전면적으로 지지해 1898년 우시고메구 와카미야초若宮町에 편집소를 열기로 했다. 이미 외국에서 정평을 얻은 백과사전을 번역하는 것이라면 어려움이 많아도 계획이 간단하여 착실히 번역을 계속하면 되지만, 새롭게 ‘일본’의 ‘백과사전’을 만드는 일이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대사업으로 시정市井의 보잘것없는 출판인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했다. 가메이와 사이토는 여러 방면의 유력자들을 만나 백과사전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사업을 지원해줄 사람을 한 명씩 늘려가면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어갔다.
편수총재 백작伯爵 오쿠마 시게노부大 重信
미술부 명예고문 남작男爵 구키 류이치九鬼隆一
편수고문 이노우에 데쓰지로(문학)・다지리 이나지田尻稻次郞(법학)・쓰보우치 유조坪內雄蔵(문학)・ 우메 겐지로梅謙次郞(법학)・마쓰이 나오키치松井直吉(이학)・후루이치 고이古市公威(공학)・ 미야케 히이즈(의학)
위와 같이 당대의 권위자를 모아 시작한 편찬 작업은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학문적·경제적·기술적 문제에 맞닥뜨렸으나 편찬소 개설 이후 10년 뒤인 1908년 8월 드디어 제1권(あ부터 えんを까지)을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간행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11월 21일, 와세다의 오쿠마 백작 저택에서 발행 축하연이 성대하게 열렸다. 남작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를 비롯하여 2000명이 넘는 조야의 명사들이 모였으며, 문부대신 자작 마키노 노부아키 등의 축사가 이어졌고, 해군 중장인 남작 기모쓰키 가네유키肝付兼行는 “우리나라의 빛으로 공경하고, 우리나라의 보물로 사랑할 책이 바로 이 책”이라는 노래로 그 공을 치하하면서 성대한 의식에 대한 감격을 표현했다. 시마다 사부로, 시가 시게타카志賀重昻 등의 연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신문이나 잡지도 앞다투어 축하연의 정경을 기사화했다. 조야의 관심을 모은 ‘일본’의 ‘백과사전’의 출현은 20세기 초 국력의 융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졌고, 신문사는 대일본맥주주식회사, 가네가후치鐘ヶ淵방적주식회사의 생산 현장 소개와 더불어 『일본백과대사전』의 편집 풍경을 활동사진으로 촬영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상영하기도 했다.
일본과 주변 국가들에 대한 관심
『일본백과대사전』 제1권을 펼치면 맨 처음에 오쿠마 시게노부의 서문이 실려 있고, 이어서 총재 이하 고문들의 사진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시 분과를 담당했던 대가 104명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이 사진과 대가들의 이름만 보아도 그야말로 메이지 문화사의 한 면을 볼 수 있으며, 메이지 시대 후반 학계의 유력자들이 모두 모여 이 백과사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제1권을 위해 원고를 쓴 각 분야의 대가는 245명에 이른다.
간행의 중심이 된 사람들의 사진에 이어 나오는 일러두기凡例에서는 이 백과사전의 기본적인 성격을 설명한다.
一. 본서는 사회의 모든 사물에 관한 말을 널리 수집하여 그것에 해석을 달아 수록한 것으로 동서고금에 걸쳐 있다.
一. 본서에 게재된 사항들은 우리나라 및 기타 동양 제국에 관한 것을 주로 다루고 있으며, 서양에 관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교상, 그리고 일반 가정에 필요하다고 믿는 것으로 한정한다.
다이쇼大正 시대 이후 일본의 백과사전에 대해 굳이 말한다면 서양의 문화를 소개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는데, 이 『일본백과대사전』은 일본과 동양 여러 나라에 관한 것을 주로 다룬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점이 이 사전에 깊이와 충실함을 가져온 열쇠였고, 이는 당시 일본 사회의 문화 수준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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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지도자들은 서구 문화의 도입에 목숨을 건 노력을 계속했다. 정부는 수많은 외국인을 초대하여 특별 채용하고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으며, 대학 강의도 영·독·불어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기회가 닿아서 메이지 시대 학생들의 노트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아름다운 구문歐文 펜글씨의 서체에 도취해 자유롭게 외국어로 답안지를 쓰고 보고서를 작성한 메이지 시대 청년들에 대해 경외감을 금할 수 없었다. 메이지 시대에 『일본백과대사전』과 같은 엄청난 분량의 백과사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고가高價의 서책을 구매하려고 한 사람들은 대부분 영·독·불어 가운데 하나는 이해했다. 그들의 서구 문헌 독해력과 외국어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려는 의욕은 현대의 일본인을 훨씬 능가했다.
따라서 『일본백과대사전』을 구입하는 지적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서양 사회와 문화에 관한 지식을 서구 각국에서 만든 여러 가지 백과사전을 통해 얻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전통 있는 서구 각국의 백과사전과 달리 일본에서 만든 백과사전이라면 일본과 동양 여러 나라에 관한 것을 잘 파악해 서구 백과사전의 결함을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다이쇼 시대에서 쇼와昭和 시대로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서구 사회와 문화에 관한 지식이 서민들에게도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 백과사전에 서구에 관한 항목이 대폭 늘어났고, 그에 따라 동양 여러 나라에 관한 항목은 전체적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허술해졌다.
그러나 『일본백과대사전』이 동양 여러 나라의 문화에 관한 항목을 선택하고 해설하는 일에 힘을 쏟았던 것은 서구 백과사전과의 관계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이토 세이스케가 전문용어사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전문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백과사전의 구상을 싹 틔울 무렵 일본은 청일전쟁을 경험했다. 전쟁 후 국민들 사이에서 조선과 청나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또한 백과사전의 편찬을 구체화해 10년 뒤 제1권을 간행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일본은 러일전쟁을 경험했다. 조선과 청나라에 대한 관심은 복잡한 양상을 띠었는데, 이토 히로부미나 시나가와 야지로品川弥二郞는 일본이 진출하려는 지역의 사회와 문화에 관심을 보이며 그 지역들을 시찰할 때 사이토에게 동행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동양 국가들에 대한 이와 같은 높은 관심이 당시 정세와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동양을 중시한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서양 관계 항목을 끌어들인 이 백과사전은 선정한 항목을 아이우에오あいうえお, 즉 50음순으로 배열했다. 제10권의 권말에 실린 집필 대가 104명의 사진과 이름을 이로하순으로 배열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는 50음순이 아니라 이로하순으로 배열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친숙했다. 이 책에서 열거한 수많은 백과사전적인 서적은 중국 유서의 방법을 이어받아 체계적인 분류로 구성되었지 표제어를 발음순으로 배열하는 방법을 채택하지는 않았다. 현재도 일본에서는 대중적인 가정백과, 학습백과, 현대용어백과의 편집은 부류별 구성을 취하고, 각 부류별로 50음순으로 배열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전체를 50음순으로 배열하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임을 『일본백과대사전』의 일러두기에서 누누이 설명하는데, 이는 20세기 초부터 겨우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배열 방법이었다. ‘이로하’에서 ‘아이우에오’로의 통일이라는 움직임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중대한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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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을 ‘あ부터 えんを까지’로 간행할 때 『일본백과대사전』은 사이토 세이스케의 계획으로는 전6권, 색인 1권으로 합계 7권이었다. 그러나 제1권을 발행한 뒤 여러 가지 의견이 들어온 데다가 독자의 희망에 따라 점차 계획이 확대되고, 집필자의 원고도 상세한 것이 많아져 어쩔 수 없이 권수가 늘어나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 사전의 간행이 대단히 어려운 사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전권의 완성을 보기까지 21년, 최초의 편찬부터 헤아리면 격동 속에서 31년이나 걸렸으니 편집 도중에 새로운 문제가 등장한 것은 당연했다. 항목은 해가 갈수록 늘어만 갔고 결국 최종 부분에 덧붙여 보유정정補遺訂正 314쪽, 색인 523쪽을 수록한 제10권으로 완결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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