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입법자 뤼쿠르고스에 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그의 가문과 여행과 죽음, 특히 입법자와 정치가로서의 그의 업적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기에 관해서도 역사들 사이에서 의견이 전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한 한 부류에서는, 이피토스와 동시대인으로 이피토스를 도와 올륌피아 경기 기간의 휴전을 주선한 이가 뤼쿠르고스였다고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올륌피아에 보존되어 있는 원반에 뤼쿠르고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에라토스테네스와 아폴로도로스 같은 사람은 스파르테 왕위 계승자의 명단으로 시대를 계산해본 뒤 뤼쿠르고스가 제1차 올륌피아 기紀보다 여러 해 전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티마이오스는 스파르테에는 서로 다른 시기에 두 명의 뤼쿠르고스가 살았는데, 그중 한 명이 이름을 떨치자 두 사람의 행적이 모두 그 한 사람에게 돌려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티마이오스는 또한 둘 중 더 일찍 태어난 쪽은 호메로스와 가까운 시기에 살았다고 추정하며, 그가 실제로 호메로스와 대면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크세노폰도 뤼쿠르고스가 헤라클레스의 후손들Herakleidai의 시대에 살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가 옛날 사람일 거라는 인상을 준다. 스파르테의 마지막 왕들도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긴 하지만, 크세노폰은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라는 이름으로 헤라클레스의 자식과 손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기록이 뒤죽박죽이라 해도 나는 뤼쿠르고스에 관해 기술하면서 자가당착이 덜 심하고 나름대로 가장 믿음직한 증언을 하는 작가들을 따르려고 시도할 것이다. 시인 시모니데스는 뤼쿠르고스가 에우노모스의 아들이 아니라, 뤼쿠르고스와 에우노모스가 프뤼타니스의 아들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데모스는 프로클레스를 낳고, 프로클레스는 소오스를 낳고, 소오스는 에우뤼폰을 낳고, 에우뤼폰은 프뤼타니스를 낳고, 프뤼타니스는 에우노모스를 낳고, 에우노모스는 첫째 부인에게서 폴뤼덱테스를, 둘째 부인 디오낫사에게서 차남 뤼쿠르고스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디에우튀키다스의 기록인데, 그에 따르면 뤼쿠르고스는 프로클레스의 6세손이고, 헤라클레스의 11세손이다.
2.
뤼쿠르고스의 선조들 가운데 가장 추앙받은 이는 소오스였는데, 그의 치세 때 스파르테인들은 헤일로테스들을 노예로 삼고, 아르카디아 지방의 상당 부분을 나누어 받아 자신들의 국토로 삼았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 번은 소오스가 물도 없는 험한 곳에서 클레이토르인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자신과 부하들이 모두 가까운 샘에서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준다면 자신이 정복한 땅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양쪽이 그렇게 하기로 서약하자 그는 부하들을 모아놓고 누구든 물을 마시지 않는 자에게 자신의 왕국을 주겠다고 했으나 그들은 참지 못하고 모두 물을 마셨다. 소오스가 마지막으로 샘물 있는 곳으로 내려가 적군이 여전히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얼굴에 물을 끼얹기만 하고 돌아서며 모두가 다 마신 것은 아니라는 핑계로 땅을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이런 이유들로 소오스가 추앙받았지만, 에우뤼폰가家라는 가문의 이름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들 에우뤼폰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에우뤼폰은 대중의 호감과 인기를 얻기 위해 처음으로 왕권의 지나친 독재적 성격을 완화했던 것 같다. 그렇게 왕권이 완화되자 백성들은 점점 대담해졌으며, 나중의 왕들은 더러는 대중을 억압하려다 미움을 샀고 더러는 아부하고 나약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왕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리하여 무질서와 혼란이 오랫동안 스파르테를 지배했다. 그러다가 뤼쿠르고스의 부왕父王 에우노모스가 살해되는 일이 일어났다. 에우노모스는 말다툼을 말리려다 식칼에 찔려 죽어가며 장남인 폴뤼덱테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3.
그 뒤 폴뤼덱테스도 오래지 않아 죽자, 모두가 예상했듯 뤼쿠르고스가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형수가 회임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뤼쿠르고스는 형수가 아들을 낳을 경우 왕국은 그의 것이라고 선언하고 자신은 섭정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했다. 아버지가 없는 왕의 섭정을 라케다이몬인들은 프로디코스prodikos라고 불렀다.
그런데 형수가 몰래 사람을 보내, 만약 뤼쿠르고스가 왕이 될 경우 자신과 결혼하겠다면 뱃속의 아이를 지우겠다고 전했다. 그는 그녀의 성품이 미웠지만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동조하며 받아들이는 척했다. 그는 형수에게 굳이 태아를 지우려고 약을 먹거나 하여 몸을 상해가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냐며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자기가 알아서 없애버리겠다고 했다. 이런 말로 산달이 될 때까지 형수를 속였다. 그리고 형수가 해산할 때가 되자 그는 시종들을 보내 그녀 곁에 앉아 해산을 지켜보되,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여인들에게 맡기고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자기에게 안고 오라고 일렀다.
마침 뤼쿠르고스가 관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 하인들이 갓 태어난 사내아이를 안고 왔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아이를 받아 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스파르테인들이여, 그대들의 왕이 태어났소이다.”라고 말한 후 옥좌에 누이고는 카릴라오스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고, 그의 고결하고 올곧은 성품에 감격했다.
그는 모두 여덟 달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는 그 밖에 다른 점에서도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왕의 섭정으로서 왕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보다는 그의 덕을 흠모해 그와 함께하며 그의 명령을 기꺼이 수행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뤼쿠르고스를 시기하여 그토록 젊은 그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일파도 있었다. 특히 모후母后가 된 형수의 친척들과 가족들이 그러했는데, 그들은 모후가 모욕을 당했다고 믿었다. 한 번은 그녀의 오라비 레오니다스가 대담하게 험담을 하며 뤼쿠르고스가 언젠가는 왕이 되려는 마음을 품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를 의심받게 하고, 어린 왕에게 불상사가 일어날 경우 뤼쿠르고스가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당하도록 선수들을 치려는 것이었다. 모후도 그와 비슷한 비방의 말을 퍼뜨렸다. 뤼쿠르고스는 괴롭기도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렵기도 했다. 그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조카가 다 자라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낳을 때까지 나라 밖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4.
그렇게 그는 스파르테를 떠나 먼저 크레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여러 형태의 정체政體를 공부하고, 명망 있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그들의 법들 가운데 어떤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 적용해볼 양으로 진심으로 감탄하며 받아들였고, 또 어떤 것은 경멸할 뿐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현명한 정치인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되던 탈레스와 친근하게 사귀며 스파르테로 가도록 탈레스를 설득했다. 탈레스는 서정 시인으로 행세하며 예술로 자신의 실체를 은폐했지만, 사실은 가장 강력한 입법자들이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그의 노래들은 복종과 조화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들의 이런 면은 질서정연하고 차분한 음악과 율동으로 더욱 고조되어, 그것을 듣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품이 온유해져 당시 그곳에 팽배하던 상호 적대감을 버리고 고귀한 것을 함께 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뤼쿠르고스에게 탈레스는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한 구상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뤼쿠르고스는 크레테에서 아시아로 항해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치 의사가 건강하지 못한 병든 신체를 건강한 신체와 비교하듯이, 낭비적이고 사치스러운 이오니아의 생활 방식과 검소하고 엄격한 크레테의 생활 방식을 비교함으로써 양쪽의 생활 방식과 정체의 이런저런 차이점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아시아에서 그는 처음으로 호메로스의 시를 알게 되었는데, 아마도 크레오퓔로스의 자손들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쾌락과 방종을 부추기는 구절 못지않게 그 시들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교육적 요소에도 진지하게 주목해야 함을 깨닫고 고향으로 가져가기 위해 그 시들을 열심히 베끼고 모았다. 호메로스의 시들은 헬라스인들 사이에서 막연하게나마 벌써 알려져 있었고, 그 시들이 우연히 여기저기로 옮겨진 까닭에 소수 사람들은 그중 일부를 갖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그 시들을 본격적으로 알린 것은 뤼쿠르고스였다.
아이귑토스인들은 뤼쿠르고스가 그들을 방문해 전사戰士 계급을 나머지 다른 계급과 분리한 것을 본 후 깊은 감명을 받아 그것을 스파르테에 적용했으며, 기술자와 수공업자들이 정부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스파르테의 정체를 진실로 세련되고 순수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아무튼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몇몇 헬라스 역사가들이 뒷받침한다. 그러나 뤼쿠르고스가 리뷔에와 이베리아로 갔으며, 인디아까지 가서 나체 수도자들과 어울렸다고 말한 사람은, 내가 알기로, 스파르테인인 힙파르코스의 아들 아리스토크라테스 말고는 아무도 없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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