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없는 것
약 넣으러 왔어요
길모퉁이 시계 가게 주인은 저녁 식사 중이다 먹고 있던 배달 도시락 뚜껑을 덮고 일어난다 낡은 작업대로 가서 보조 확대경을 왼쪽 눈에 붙이고 시계 뚜껑을 연다
시계가 멈춘 지 오래되었죠? 시계 배터리에 녹이 슬었네요 이 배터리는 이제 안 나옵니다 이십 년 전에도 구하기 어려웠어요 특이하게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이 반대로 장착된 배터리라 시계판 전체를 바꿔야 하는데 그러느니 새로 사는 게 낫죠
어떻게든 약을 구할 수 없을까요?
이제 어디서도 구할 수 없을 겁니다
남대문 시장에서도 오래된 시계를 잘 고치기로 소문 난 할아버지가 포기하라고 말한다
나는 여러 시계 수리점을 거쳐서 여기 왔다
아버지가 차던 오메가 시계인데
바람 부는 골목에 서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니
오메가란 그리스 말로 끝, 종말이란 뜻이라고 나온다
마지막으로 넓고 환한 귀금속 가게에 들어왔다
나보다 먼저 온 이가 목걸이를 팔고 현금을 받아 나갔다
그 순금목걸이가 그렇게 싸요?
저 아가씨가 어젯밤에 와서 이게 맘에 든다며 같이 온 남자분한테 선물받은 건데요, 오늘 도로 갖고 와서 현금으로 달라고 했어요 살 때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되판 거죠
여기서도 내 시계 알은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오십 년 넘은 시계니까 골동품으로 간직하라고 했다
나는 다리가 아파서 좀 쉬었다가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주인과 함께 천장 가까이 매달린 작은 텔레비전을 보았다
금을 팔고 간 아가씨는 남자를 바꿔 가며 자주 오는데 항상 순금제품을 고른 후, 다음 날에 혼자 되팔러 온다고 했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이 골목에는 출생 신고하지 않은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고 나이가 차도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유령처럼……”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아시아 저 골목은 여기와 닮았다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몸을 거래하는
나는 약이라고 부르고 시계방 주인들은 알 혹은 배터리라고 부르는 이 작고 둥근 것을 매만진다 다 닮은 세계를 손바닥에 놓고 본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
에튀드
삐걱거리는 마루 위를 걸어갔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굳어 있던 손가락이 움직였다
네가 올 거니까
정원에는 새하얀 침대 커버가 마르고 있다
긴 장마가 끝났다
어제까지 흘린 눈물과 땀이 빈틈없이 사라지는 정오
다시 폭풍과 기근, 역병이 올 거라는 뉴스가 들렸다
찬장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고 유리잔을 떨어뜨렸지만 아무것도 깨지지 않았다
네가 올 거니까
숟가락으로 죽을 뜨며 할머니가 말한다
전쟁 중에서 결혼하고 피난 중에도 아기를 낳았다고
살아 있으면 만난다고
흔한 말인데 오늘따라 웃음이 난다
처음 듣는 음악처럼 귀에 들어온다
네가 올 거니까
새벽은 더 이상 푸른 절벽이 아니고
밤은 더 이상 미완의 종말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연주할 곡을 고르는 동안
무한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되찾는 동안
더디게나마 네가 오고 있는 동안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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