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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최초의 계엄은 미군정 하에서였다
1945년 해방후 발표된 최초의 계엄은 미군정 하에서였다. 미군정은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이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에 사실상 일상적인 계엄이나 다름없었다. 계엄이 굳이 필요 없을 시기에 이중 계엄의 성격을 띠는 계엄령이 발령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최초의 계엄이 시행된 곳은 대구였다.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좌익 세력이 강했다. 콜레라가 창궐한데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통받던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경찰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면서 시위는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경찰의 힘으로 사태를 수습할 수 없게 되자 미군이 개입하였다. 장갑차를 동원한 미군은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며 1946년 10월 2일 계엄령을 발포하였다.
대구 시민의 투쟁을 억누르기 위해 계엄령이 발동되었지만 시위는 대구 인근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남한 전역으로 확산한 시위는 12월 중순에 가서야 잠잠해졌다.
미군정의 미곡 정책 실패와 쌀 투쟁
연합국에 맞서 싸우던 일본이 항복하자 38선 북쪽의 한반도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였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모습을 나타냈다. 미군이 상륙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때 돌연 총성이 울리며 사람들이 쓰러졌다. 일본 특별경찰대가 군중을 향해 발포한 것이다. 두 사람이 숨지고 십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9월 9일자 《뉴욕타임스》는 ‘환영 군중에 발포한 것은 미군사령부의 지시 때문’이라고 전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여전히 치안을 맡고 있던 것은 일본 경찰이었다.
이에 앞서 9월 2일 미군은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 명의의 전단을 살포했다. 〈남한 민중 각위께 고함〉이란 제목의 포고령에는 ‘일본인과 미 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와 ‘경솔하고 무분별한 행동’으로 목숨을 잃거나 국토가 황폐화될 수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미군 스스로 ‘점령군’임을 밝힌 것이다.
9월 12일 하지 중장이 아놀드 소장을 군정장관에 임명함으로써 본격적인 미군정 체제가 가동되었다. 미군정은 대한민국임시정부나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치안대 등의 자치기구를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 핵심은 한국인 행정관리와 경찰이었다.
일제가 패망하던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일하던 한국인 경찰과 헌병은 1만 명 남짓 되었다. 이들의 상당수가 미군정 경찰로 변신하였다. 특히 경사 이상 간부의 80%는 일제 출신이었다. 미국 정치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좌익에 대항할 만한 다른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미군정이 일제 경찰 출신을 중용했다고 분석했다. 권력에 길든 일제 경찰 출신들은 소련과의 체제 경쟁이 불가피한 당시 현실에서 하수인으로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일제 경찰과 헌병 출신들에게 해방은 커다란 위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기회주의적 줄타기와 기민한 변신으로 위기를 돌파하였다. 이들의 뒷배가 되어준 것은 미군정과 당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우익 계열의 한민당이었다. 북한에서 쫓겨난 일제 경찰 출신들도 속속 미군정 경찰에 합류하였다. 공산당의 박해를 받은 일제 경찰 출신들이 남쪽으로 피신해 내려온 까닭이다.
미군정 기간은 물론이고 국군이 체계를 잡기까지 한동안 경찰은 가장 강력한 물리력을 행사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사상통제와 정보수집 등을 독점하면서 온갖 음모와 술수로 친일파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막아서는가 하면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양심 세력의 정치집단화를 방해하였다. 권력에 빌붙어 민중을 탄압하는 친일 경찰의 행태는 많은 국민의 반감을 자아냈다.
미군정은 폭압적이고 비민주적이었을 뿐 아니라 정무와 행정에 미숙했다.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우리 국민은 큰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보다도 경제 사정이 더 나빴다. 해외 동포들이 귀국하고 월남민이 늘어나면서 실업률은 급증하고, 조선총독부가 불법으로 찍어낸 화폐의 효력을 미군정이 인정하는 바람에 화폐 가치가 폭락하였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미군정이 실패한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미곡 정책이었다. 1945년 10월 미군정은 ‘미곡의 자유시장에 관한 일반고시 제1호’를 발표하였다. 그동안 조선총독부가 시행해 온 미곡의 공출 배급제를 폐지하고 미곡의 자유판매를 부활한 것이다. 결과는 기대와 너무 달랐다.
우선 인구가 급증한데 따라 쌀의 수요가 크게 늘었다. 여기에 투기꾼들의 사재기가 겹쳤다. 일본으로 쌀을 밀수출하는 자들까지 등장하였다. 일본으로 쌀이 반출되는 데는 연합국 총사령부의 정책이 한몫했다. 일본을 공산주의를 막는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한반도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유출한 것이다. 그 결과 풍년이 들었는데도 쌀값은 안정되지 않고 많은 국민이 굶주리게 되었다. 미군정은 쌀값 상한선을 정하는 등 소매가격 통제에 들어갔다. 하지만 암시장을 통한 거래가 늘면서 쌀값은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미군정은 다음해인 1946년 1월 자유수급제를 포기하고 공출제로 전환하는 미곡수집령을 공포하였다. 다시 미곡의 강제 공출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공출 가격이 시장 가격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 점이었다. 생산비에 미달하는 가격으로 농민들은 쌀을 강탈당했다.
농민들이 공출에 반발하자 강압적인 방식이 동원되었다. 경찰을 앞세워 미곡 수색에 들어간 것이다. 응하지 않는 사람은 연행되었다. 미군정은 심지어 춘궁기에 보리까지 공출하였다. 우리 국민은 일제강점기 동안 미곡 공출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다. 게다가 공출제도가 부활하니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쌀을 강탈하는 데 앞장선 것은 친일 경찰이었다. 청산 대상인 친일 경찰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점점 그 수위가 높아졌다.
도시민도 미곡 정책에 반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배급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이 다르게 민심이 흉흉해졌다. 급기야 1946년 7월 무렵부터 대구, 부산 등지에서 ‘쌀 투쟁’이 벌어졌다.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부산에서는 7월 6일 수만 명의 시민이 부청으로 몰려가 쌀을 달라고 외쳤다. 시위대는 식량 배급소에도 들이닥쳤다. 미군정은 경찰과 미군 헌병은 물론 장갑차까지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계엄령을 발포케 하는 상황까지 많은 시민이 부상당했다.
대구와 경북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민심이 더 나빴다. 해방 이후 유입된 귀환동포만 30만 명에 이르렀다. 1946년 5월 무렵에는 전국에 걸쳐 콜레라가 창궐하였다. 당시 대구는 콜레라 발병률 전국 1위를 기록했으며 경상북도까지 포함하면 사망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 콜레라가 퍼지지 않도록 방역 조치를 취한다며 미군정은 대구와 경북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을 전면 통제했다. 식량 공급이 끊기자 대부분의 대구 시민들은 끼니를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심각한 기아 상태에 빠진 시민들은 ‘배고파 못살겠다’며 대구부청과 경북도청으로 몰려가 목숨을 구해달라고 울부짖었다. 7월 2일자 《영남일보》는 ‘쌀은 주지 않으면서 배가 고파 늘어져 있으면 콜레라에 걸렸다고 잡아간다’며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던 당시 시민들의 참상을 적고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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