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거대한 교란
코로나19는 그전 10년간 맹렬한 교란이 있고 난 와중에 닥쳤다.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던 시점에, 민주정에서의 정치가 얼마나 허약하고 미끄러지기 쉬운지에 대한 정서가 북미와 유럽에 팽배했다. 미 하원은 소위 ‘우크라이나 스캔들’ 혐의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다. 상대 후보가 될 것이 유력한 정치인의 신뢰도를 깎아내리기 위해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압박해 표적 수사를 종용했다는 혐의였다. 영국에서는 브렉시트를 결정한 국민투표 결과가 유지되어야 하는지를 두고 3년 반을 끈 정치 싸움이 2019년 12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안정적 과반으로 승리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의 새 내각은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저항에 직면하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스코틀랜드가 스스로의 의사에 반해 유럽연합이하 ‘EU’에서 나가게 되었다는, 재앙적으로 단순한 논리에서 재점화된 저항이었다. 독일 튀링겐주에서는 정부 구성을 위해 지역의 기독민주연합Christlich Demokratische Union Deutschlands이 극우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과 일시적으로 협력했다. 이에 대해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며 “민주주의에 안 좋은 날”이라고 말했다.
지정학 측면에서는 파괴적인 교란이 더 광범위한 규모로 나타났다. 2020년 1월에 미국과 중국은 거의 2년이나 이어지던 무역 전쟁을 끝내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홍콩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와 미 의회의 홍콩인권법 통과로 미·중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는 동안, 중동에서는 북쪽의 시리아부터 남쪽의 예멘까지 도처에서 분쟁이 벌어졌다. 어떤 분쟁은 북대서양조약기구이하 ‘NATO’ 내부에 오랫동안 존재해온 갈등을 드러냈다. 2019년 가을, 트럼프는 시리아에서 일방적으로 미군 철수를 시도했고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를 틈타 튀르키예군이 시리아 북부로 밀고 들어왔다. 튀르키예의 군사 행동과 그것을 가능케 한 트럼프의 행동에 분개한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의 안보에 미온적으로 보이는 트럼프를 비판하며] “현재 우리는 NATO의 뇌사 상태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메르켈은 곧바로 마크롱의 입장과 거리를 두면서 “독일의 관점에서 NATO는 (…) 우리의 안보동맹”이라고 말했다. 2020년 1월 3일, 트럼프는 이란이 뒤를 대는 이라크 무장세력이 바그다드 주재 미 대사관을 습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 이란 해외작전사령관의 암살을 일방적으로 지시했다. 임박한 영국의 EU 탈퇴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 중이던 입장 차를 잠시 접어놓고, 존슨, 마크롱, 메르켈은 “고조되는 긴장을 시급히 완화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언론에는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정치 논평들이 정신없이 쏟아져 나왔다.
경제 측면을 보면,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거의 모든 곳에서 성장 전망이 악화되고 있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연준’는 통화 공급을 소위 ‘정상화’ 비슷하게라도 되돌려보려 했던 3년간의 시도2008년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로 과도하게 풀린 통화를 일정 정도 도로 거둬들이려 한 시도로, 거의 계속 실패했다를 포기했다. 2019년 9월에 은행끼리 1일물 단기 자금을 융통하는 머니마켓[초단기 자금 시장]이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2007~2008년 금융 붕괴의 서막으로서 2007년 8월에나 보았던 수준의 자금 경색이었다. 양적완화라고는 극구 표현하지 않으면서, 연준은 자산매입 프로그램으로 돈을 찍어내는 것, 그러니까 양적완화를 재개했다. 두 달 뒤,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도 유럽판 양적완화를 재개했다. 이것이 독일에서 합헌인지에 대해 독일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판결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지난 10년간 세계 경제의 성장을 중대하게 견인했던 중국마저 큰 폭의 성장 둔화를 겪고 있었다.
에너지 측면에서는, 세계가 전환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2009년 이래 처음으로 세계 연간 석유 생산량이 줄었다. 석유 소비량과 생산량 사이의 격차는 2007년 이래 가장 컸는데, 2007년은 1년 내내 유가가 계속 올라 2008년에 결국 배럴당 150달러까지 치솟았던 때다. 2007~2008년 금융 붕괴 이후에 형성된 신용시장 상황은 미국의 셰일오일 분야로 자본이 쏟아져 들어오게 했지만[금융위기 이후 경기 부양을 위해 연준이 양적완화와 제로금리 정책을 펴면서 시중에 자금이 넘쳐났고 투자자들은 수익률이 제로보다 높기만 하면 어떤 곳에라도 투자할 태세였다. 이 투자금이 셰일 분야로 대거 흘러갔다], 이제는 기후 대응을 촉구하는 압력이 높아지면서 투자자들이 미국과 유럽의 석유회사들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10년 전이었다면 석유 산업의 중기적 위기로 보였을 것이 이제는 세계가 향후 30~40년이 지나기 전에 화석연료를 떼고 녹색에너지로 전환하리라는 고무적인 증거로 보였다.
이렇게 광범위한 교란 위로 코로나19 위기가 덮쳤다. 코로나19는 그 자체로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지만, 직전 10년간의 교란을 살펴볼 수 있는 창문이기도 하다. 2020년에, 코로나19는 이미 2010년대의 모양을 잡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던 갈등의 단층선들을 다시 한번 흔들어 깨웠다.
이 교란 모두를 꿸 수 있는 하나의 설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교란의 원인 중 많은 것이 현실에서 영향을 일으킬 때 상호작용을 했다. 브렉시트를 보자. 이 사건에는 영국의 정치적 맥락, 유로화와 별개로 존재하는 영국 화폐, 바꾸기 어려운 EU의 구성법적 원칙 등이 작용했다. 하지만 이에 더해 브렉시트는 표면적으로는 이 사안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더 광범위한 변화들의 산물이기도 했다. 2011년 유가가 급등했을 때 연준과 영란은행은 대응하지 않은 반면 유럽중앙은행은 두 차례나 금리를 올렸다. 영국 경제가 계속 회복하는 동안 유로존은 불황으로 다시 떨어졌다. 이후 몇 년간 영국은 유로존 남부 국가 사람들에게 ‘최종고용자’ 역할을 했고, 유럽중앙은행 총재 마리오 드라기Mario Draghi는 독일 헌재가 용인해줄 수 있을 법한 형태의 대규모 자산매입 프로그램을 구상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드라기가 마침내 메르켈에게 그런 방도가 있다고 설득했을 때,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은 영국 유권자들에게 EU 탈퇴 여부에 대해 투표할 기회를 약속하긴 해야겠다고 반쯤 결론 내린 상태였다. 그런데 EU 탈퇴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준비하던 동안 시리아 난민 위기가 터졌고, 이는 캐머런이 현 상태[영국의 EU 잔류]를 지속해야 한다고 유권자들을 설득해야 했던 바로 그 시점에 영국 유권자들 눈앞에 EU에서 독일의 영향력이 너무나 크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말았다[EU의 난민 대응을 메르켈이 주도했다].
브렉시트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미 대선에서 일종의 반란에 성공한 데도 물론 특정한 배경이 있었다. 이 경우에는 미국 국내 정치에 오랫동안 존재해온 분열과 갈등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 사건에도 더 폭넓은 지정학적 맥락이 있었고, 미국이 수십 년만에 세계 최대 석유 및 가스생산국으로 재부상한 것과 2015년 이후 중국이 산업 전략을 수정한 것, 그리고 러시아가 중동에서 다시 세력 주장을 시작한 것이 그 맥락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은 “미국의 힘이 센 곳에서는 그 힘이 쓰이지 않고 있고 미국의 힘이 약한 곳에서는 미국이 발을 못 빼고 묶여 있다”는 그의 주장이 미국 유권자들에게 매우 호소력 있었다는 점이었다. 2016년 대선에서 첨예한 쟁점이 된 “지정학적 선택”의 문제에는 구조적인 배경이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더 가까워지고 있는 세계에서, “중국에 맞서자”는 후보트럼프가 “러시아에 맞서자”는 후보힐러리 클린턴, Hillary Clinton에게 반기를 들고 나와 승리한 선거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선거에 이어서 트럼프의 집권기는 그 자체로 불안정을 일으키는 교란 요인이었다. 그는 명시적으로 중국을 ‘전략적 경쟁국strategic rival’으로 규정하면서 임기를 시작했는데, 이는 미·중 경제 관계를 지정학적 대치의 문제로 만들었고 유럽과 NATO에 커다란 파급 효과를 일으켰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중동에서 러시아가 제기하는 군사적 위협보다 중국의 테크놀로지 위협을 더 우선시하면서도, 미국의 셰일가스 붐을 이용해서 러시아의 대對유럽 가스 수출을 이전 대통령들보다 더 공격적으로 저지했다. 미국 권력의 전반적인 방향 재조정에 직면한 유럽 국가들은 미국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유럽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뒤죽박죽으로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NATO 동맹국인데도 유럽의 안보에 신경을 안 쓰는 듯한 트럼프의 행동을 두고] 마크롱이 한 발언을 메르켈이 곧바로 반박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났듯이 말이다.
트럼프의 승리를 가능케 했던 지정학적 요동은 처음부터 미국의 국내 정치에 파장을 일으켰다. 임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가 대통령직에 오르는 것의 정당성에 문제제기가 일었다. 트럼프 반대자 중 일부는 트럼프가 상당히 문자 그대로 지정학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이를테면 힐러리 클린턴은 트럼프가 블라디미르 푸틴의 “꼭두각시”라고 주장했는데,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이 주장은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여부를 수사하는 뮬러Mueller 특검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맡는 것이 정당한가’를 둘러싼 싸움은 백악관에서 러시아 권력이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라는 우려나 트럼프가 대통령직의 실질적·상징적 무게를 천박하게 깔아뭉개는 듯 보인다는 점 등을 훨씬 넘어선 문제였다. 이 싸움은 2016년에 미국인 상당수가 대선이 앞으로 4년간 미국 대통령이 누구일지를 확정했다고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같은 문제가 더 극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2020년 대선 때 다시 나타났다. 이때 이 문제는 트럼프가 부통령을 압박해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당선인[조 바이든, Joe Biden]의 대선 승리를 확정짓지 못하게 하려 한 시도와 2021년 1월 6일에 의사당에 폭도가 난입한 사건으로 정점에 올랐다. 민주정 국가인 미국의 선거에서 현재 ‘패자의 동의’[진 쪽의 승복]가 사라졌는데, 패자의 동의 없이는 어떤 민주정은 가능할 수 없다.
지난 10년간의 교란에 대해 수많은 글과 논평이 나왔다. 많은 분석이 포퓰리스트의 민족주의라는 틀에서 이야기되거나 2007~2008년 경제 붕괴와의 연관성 하에서 이야기되거나 소위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의 붕괴라는 맥락에서 이야기되었다. 하지만 시스템 수준의 구조적 요인이 무엇인지와 관련해서는 설명되지 않은 것이 많았다. 에너지가 오늘날 지정학적·경제적 단층선을 흔들어 깨우는 중요한 요인임이 간과되었다는 점이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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