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생의 사랑
신이 가끔 내게 나쁘지 않은 선물을 줄 때가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주목받는 것을 좋아했다. 이모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다들 나더러 천재라고 했다. 이모 말만 잘 들으면 뭐든 어렵지 않았다. 때론 이렇게 술술 풀려나가도 되나, 싶었다. 그 생각을 너무 어릴 때 했다는 게 문제였다. “이번 한 번만 세리에게 양보하자.” 회사에서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합격 통보를 받은 사람은 애초에 세리가 아니라 나였다. 독식하면 안 되는 거라고 했다. 독식이라는 말도 그때 처음 배웠다.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나는 지는 애고 세리가 뜨는 애라고 했다. 열다섯 살의 나는 그렇게 졌다. 공식 팬클럽 회원수가 몇백만 명이라는 가수가 오 년 만에 컴백하는 곡의 뮤직비디오 주인공은 세리가 되었다. 나는 그때 그만두었다. 이번 한 번만, 이라고 했지만 다시는 내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때 어영부영 그만두었던 것 역시 신이 내게 준 선물이라고, 이제는 생각한다.
*
학교에 돌아온 나는 국영수와 음미체에 적응해나갔다. 내겐 국영수보다 음미체가 좀더 어려웠다. “배우가 왜 이렇게 몸을 못 써?”라고 말하는 교사도 있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말을 생각했다. 이젠 배우가 아닌데 여전히 나를 배우라고 부르는 사람들. 내가 정말 배우였었나 싶을 때도 있었다. 그 시절을 돌이키다보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장면은 운전하던 이모의 뒷모습이었다. 나는 이모가 몰고 다니던 소나타 뒷좌석을 침대라 불렀다. 쪽잠에 들기를 반복하다 보면 해가 지는지 뜨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모가 시동을 걸고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리는 순간에 대체로 나는 곯아떨어졌다. 그러다 코끝을 자극하는 탄내에 눈을 뜨면 이모가 시가잭으로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때마다 조금 열어놓은 창틈으로 바람이 미친듯이 불어들었다. 언제나 고속도로였다. 때론 이모가 좋아하는 엔카를 들었지만 주로 뉴스를 들었다. 이모가 틀어놓은 라디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로파이 배경음악처럼 귓가에 꽂혔고 나는 그 말들을 곱씹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하나회 척결, 노태우의 비자금 오천억원,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 비리,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배우는 몸을 쓰는 사람이라는 걸 배우를 그만두고도 한참 후에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대본을 읽고 연기 지도에 충실히 따르는 일은 내게 몸을 쓰는 일과는 다르게 여겨졌다. 현장에서는 누구든 내게 연기 지도를 했다. 감독은 물론이고 수많은 선배 연기자, 그리고 때론 이모도. 나는 학습이 빨랐고 암기를 잘했다. 학교에 돌아와서도 대본을 읽듯 교과서를 읽었다. 그때처럼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필기를 했다. 시나리오를 이해하는 일보다 교과서를 이해하는 일이 훨씬 쉽다는 건 금방 깨달았다.
내가 학교로 돌아온 해에 첫 발령을 받은 체육교사는 처음에는 열정이 넘쳤다. 막 군대를 전역한 그는 다른 체육교사와 달리 양복을 입었다. 젊고 만면에 미소를 띤 교사에게 학생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학생들은 체육교사를 욕하기 시작했다. 운동장에서 보니 교실에서보다 훨씬 못한다고 지껄여댔다. 잘생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막상 운동장에서 보니 키도 작고 왜소하다는 이유였다. 체육교사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져갔다. 학생들이 인사하면 같이 목례하며 다른 교사들과는 다르게 친절하고 깍듯한 태도를 보였던 그는 몇 개월 만에 그야말로 ‘흑화’해버렸다. 그가 서서히 미친개가 되어가는 과정을 나는 똑똑히 봤다. 군대식으로 열을 맞췄고 누군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기만 해도 발작하듯 고함을 지르며 화를 냈다. 한 사람이 잘못하면 모두가 함께 벌을 받아야 한다며 단체 기합을 줬다. 그의 얼굴색마저 잿빛으로 변해갔다. 나는 잊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가 아직 미친개가 되기 전의 모습을. 양복을 입고 웃으며 아이들의 인사를 받아주던 모습도. 그리고 줄넘기를 하기 싫다고 칭얼거리는 나를 달래던 모습까지.
체육 시간에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뜀틀을 가볍게 뛰어넘는 아이들, 평균대에서 똑바로 중심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이들, 오래달리기 시간에 운동장을 가볍게 몇 바퀴 도는 아이들, 피구 경기에서 신나게 공을 던지는 아이들을 나는 멍하니 봤다. 나는 배우를 그만두고 너무 빨리 인생의 실패를 맛봤지만 그 맛을 보는 데는 오히려 아주 짜릿한 구석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성년이 되기까지는 한참 멀어 보였고 그만큼 내게는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을 줄로 알았다. 배우는 그만뒀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변호사가 되거나 드라마 작가가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어쩌면 올림픽 챔피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무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 금메달을 치켜들지도 모른다고. 품새를 아름답게 선보이는 태권도 국가대표가 되거나, 땡볕에 완주하고 주경기장에서 세리머니를 하는 마라톤 국가대표가 될 수도 있다고. 안 될 게 뭐가 있어? 나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생방송으로 지켜본 백호 영화상의 주인공이 되어본 적도 있었는데. 그러나 체육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그런 기대가 얼마나 헛된 망상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좌향좌와 우향우라니,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다른 아이들보다 반박자 늦게 움직였다. 여학생들끼리 피구 경기를 할 때면 당연히 누구도 나를 팀원으로 지목하려 하지 않았다.
학급에서 가장 체육을 못하는 애로 찍히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인생뿐만 아니라 내 몸마저 패배했다는 걸 인정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스탠드 세 번째 줄에 영원히 앉아 있었다. 불볕더위에 운동장 한가운데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현장에서 슛 들어가던 순간이 불현듯 펼쳐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데 한때는 천재 아역이라고 불렸고 신문에서는 내 사진 밑에 미래가 가장 기대되는 청소년이라고 썼다. 아직 흑화하기 전의 체육교사가 내게 줄넘기를 내밀며 말했다.
“우리 민지, 오늘은 선생님이 반드시 성공시킨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줄넘기는 못해요.”
“그러지 말고 해보자. 하면 다 할 수 있어.”
“선생님,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민지는 뭐든 할 수 있잖아?”
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만약 줄넘기를 넘는 장면이 필요하다고 촬영장의 모든 어른이 나를 설득하는 상황이었다면 할 수 있었을까. 구석에서 노려보는 이모를 생각하며 어떻게든 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체육교사의 말은 내게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선생님, 줄넘기를 왜 해야 되는데요?”
“음, 일단 체력장 종목에도 있고.”
“체력장 점수 0점 맞아도 괜찮잖아요.”
“그러지 말고. 그러지 말고. 선생님이 이프로 사줄 테니 해보자.”
그는 자주 ‘그러지 말고’라는 말로 나를 부드럽게 설득했다. 빈말인 줄 알았는데 그는 정말로 당시 가장 유행했던 이프로 캔을 사 들고 왔다. 패키지에 그려진 둥근 복숭아를 빨리 볼 뿐 미동도 하지 않자 그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자, 이제 줄넘기해야지.”
나는 이프로까지 받아먹고 끝내 줄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 조금도 화내지 않았던 체육교사를 누가 미친개로 만들었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나는 이프로를 내밀며 나를 설득하던 그를 종종 떠올렸다. 부임한 지 반년 만에 군대 조교처럼 변해버린 그는 그로부터 이십 년쯤 흐른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보다 더 시든 잿빛 얼굴로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굴리고 있을까. 매년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도 거듭 혐오하고 또 혐오하면서, 첫해에 만났던 괴물 같은 아이들을 아직도 저주하면서 살아갈까. 민지는 뭐든 할 수 있잖아, 그 말을 듣고 이 사람 역시 나를 과거의 천재 아역 배우라고 생각하는구나, 싶어서 입을 다물어버린 기억이 난다. 꺼림칙한 불편함에 사로잡혔던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내 실패를 증명하는 일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나는 아직도 줄넘기를 못한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