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모두를 위한 디자인의 시대
2016년 미국의 시각장애인 기예르모 로블레스Guillermo Robles는 피자 앱에서 맞춤형 피자를 주문하려고 했다. 흔히 ‘반반 피자’라고 부르는 것처럼 두 가지 피자를 섞어서 주문할 생각이었다. 스크린 리더로 음성 정보를 듣고 앱을 실행하려고 시도를 거듭했으나 그는 결국 주문에 실패했다. 로블레스는 해당 피자 브랜드를 대상으로 미국 장애인법을 웹사이트와 모바일 앱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은 대법원까지 이어졌다. 결과는 그의 승리였다.
2023년 7월 한국의 한 드라마에 전통 복장을 한 아랍인 역할의 남성이 등장했다. 드라마는 이 캐릭터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을 연출하고 바람둥이로 묘사했다. 이러한 전개는 문화 이해도가 낮은 설정으로 많은 시청자의 질타를 받았다. 이에 해당 방송사는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으며, 아랍권에서는 온라인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기획이나 마케팅 담당자라면 식은땀을 흘릴 법한 상황이다.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제품이나 콘텐츠의 적절성을 감각하는 소비자의 수준과 민감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웹 영역에서는 소송도 활발하다. 2013년부터 미국 장애인법에 따라 제기된 소송 건수를 추적해 온 세이파스 쇼Seyfarth Shaw 로펌에 따르면 2021년 1만 1,400명 이상이 장애인 차별 소송을 제기했다. 2013년 대비 320% 증가한 수치다.
기업과 협업할 때 프로젝트 담당자들이 자주 요청하는 사항이 있다. ‘의사 결정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포용적 설계를 하지 않았을 때의 위험성을 실무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니’ 프레젠테이션 서두에 왜 포용적인 디자인이 필요한지 근거 자료를 밝혀 달라는 것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을 설득하려면 경제적으로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를 강조하는 방법이 용이하고, 이때 리스크와 관련된 이야기는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장애인이나 다양한 인종을 고려한 설계는 위험성 관리를 위한 것인가? 혹시 모를 막대한 손실에 대비하기 위해서? 요즘 세대가 다양성이나 포용성을 중시하니 이들의 이목을 끌려는 방편으로?
포용적 디자인을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본질을 놓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시각장애인 건축가 크리스 도우니Chris Downey의 말을 빌리고 싶다. “모든 사람의 경험에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어떤 조건이나 맥락에 따라 소외될 수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만난 인터뷰이 중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주저 없이 크리스 도우니를 꼽는다. 그는 접근성을 고려하는 디자인이 어떤 차원이어야 하는지 깨닫게 해 줬다. 접근성이란 모든 사람이 제품, 서비스, 환경 또는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TED 영상 〈Design with the blind in mind〉에서 그를 처음 알게 됐다. 45세까지 건축가로서 평탄하게 살던 그는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전맹 시각장애인이 됐다. 도면을 ‘눈으로’ 봐야만 하는 입장에서 대체 어떻게 건축가의 직무를 수행한단 말인가? 접근성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물었을 때, 그는 ‘삶의 생동감’을 이야기했다.
“빌딩과 공원 등 도시 여기저기를 보거나 듣지 않는 방식으로 감각하는 사람들의 경험에 존재하는 아름다움과 기쁨에 어떻게 말을 걸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접근성 디자인은 단순히 접근을 허가하는 수준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생동감 있게 하는 긍정적인 행위가 됩니다.”
─ 크리스 도우니,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02 《직업》 중
모든 사람의 경험에는 ‘아름다움과 기쁨’이 존재한다. 너무 당연한 말 아닌가. 꽤 많은 설계자가 이를 간과한다. 사용자가 장애인이니까, 요양 시설에 있으니까, 나이가 너무 많으니까 그들이 접하는 것은 ‘기본만 돼도 괜찮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전제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주어진 시간을 최적의 경험으로 누릴 권리가 있다. 크리스 도우니를 만나고 반년 정도 뒤 새로운 인터뷰에서 그의 이야기와 꼭 닮은 의견을 들었다.
미국 플로리다 템파Tempa의 도심에는 글레이저어린이박물관Glazier Children’s Museum이 있다. 0세부터 10세까지의 아동이 주 방문자로, 이곳에서는 직접 만지거나 기억이 오르거나 공간을 자유롭게 탐색하며 경험할 수 있다. 다양한 체험형 전시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그중 ‘선샤인 스쿼드Sunshine Squad’는 자폐성장애가 있는 10대를 위한 활동이다. 일종의 클럽 활동으로 예술 활동, 과학 실험, 산책, 놀이 등을 통해 서로 어울릴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찾는 부모는 아이를 맡기고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냈다’, ‘이번 한 주 잘 지나갔네’ 하고 안도하곤 한다. 그러나 마케팅 부문 최고책임자인 케이트 화이트Kate White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그저 그런 하루가 아니라 행복한 하루를 보낼 권리가 있습니다.” 잘 버텼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하루가 아니라, 정말 최고의 시간으로 기억될 하루 말이다. 바로 이런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설계자의 역할 아닐까?
요즘 ‘모두를 위한’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디자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모두를 위한’이라는 말에는 상당한 역설이 숨어 있다. 어떤 전문가도 제품과 서비스의 타깃을 뾰족하게 좁히라고 하지, 처음부터 폭넓게 펼치라고 하지 않는다. 모두를 위한 것은 곧 타깃 없이 방황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실제 어떤 의미일까? 여기에는 ‘경험’ 또는 ‘접근’이라는 말이 생략돼 있다. 다시 말해 모두의 경험을 위한 디자인 또는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디자인이다. 특정 사용자의 취향을 고려한 조형, 색감, 언어는 차별화돼야 한다. 그러나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얻는 경험과 접근에 관련해서는 특별한 안전상의 이유가 아닌 이상 누구도 배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제품과 서비스의 경험은 시작과 중간과 끝, 그리고 이후에 이르기까지 매우 세밀한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각 단계에서 저마다 느끼는 감정은 다를 수 있겠지만, 접근 가능한 범위와 수준은 공평해야 한다.
그래서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신체적, 정신적 조건이 각기 다른 개인들에게 최적의 경험을 전달하고자 하는 디자인이다. 추상적인 외침이 아니라 그동안 소외돼 온 사용자들이 개발 단계에서부터 참여해 함께 변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 중심의 방법론이자 지향점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차량으로 원하는 장소까지 이동하기 위한 서비스를 개발한다고 해 보자.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이동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발견하고, 이들에게 적합한 방법을 고안해 신체적·정신적 특성과 관계없이 누구나 이동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시각장애인은 정류장에서 어떻게 버스 번호를 확인할 수 있을까? 휠체어 이용자는 택시에 어떻게 탑승할까? 지하철이 사고로 지연된다는 안내 방송의 정보를 농인은 어떤 방법으로 알 수 있을까?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기존에 중점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던 사용자들을 개발 과정에 우선적으로 포함한다. 이것이 사용자에 대한 비배제성의 원리다. 다양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두 사용자가 될 수 있음을 전제한다.
점진성은 모두를 위한 디자인의 또 다른 특징이다. 수정과 보완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지속적으로 완성도를 높여 가는 것을 의미한다. 단 한 번의 설계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용자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다. 사용자 피드백을 지속적으로 반영하는 과정을 거쳐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중략)
1장
기준점Standard
제품과 서비스의 기준 다시 보기
Intro
틀린 운전자와 옳은 운전자
우리 집에는 차가 한 대 있다. 아내가 차를 운전하고 난 뒤 내가 운전석에 앉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좌석을 뒤로 밀고 룸미러를 조정하는 것이다. 아내의 앉은키에 맞춰 앞으로 당겨진 좌석과 룸미러가 나에게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평균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키나 팔 길이 차이를 고려하면 여성이 운전석이나 보조석에 앉을 때 남성보다 좌석을 더 앞으로 당기는 경우가 많다. 페달에 발을 올리려면 다리를 더 앞으로 쭉 뻗어야 하고, 대시보드 너머를 잘 보려면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야 한다.
꽤 최근까지도 차량 설계 기준을 참작할 때 여성은 ‘자세가 틀린’ 운전자였다. 대부분의 차량이 평균적인 남성의 신체 치수를 기준으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 운전자가 페달에 발을 올리고 시야를 확보하려고 좌석을 더 앞으로 당기면 ‘표준’에서 벗어난 자세가 된다. 이런 ‘표준적이지 않은 자세’로 앉으면 차량 정면충돌 시 부상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후방 충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좌석의 등받이는 남성 대비 몸이 가벼운 여성을 더 빨리 앞으로 밀어내 버린다. 2011년 미국 공중보건학회지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의 자동차 충돌 사고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비슷한 정도의 충돌 사고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했음에도 여성 운전자가 심각한 부상을 입을 확률이 남성 운전자보다 47%나 높았다.
1970년대 자동차 회사들은 에어백 개발에 열을 올렸다. 인체 모형을 활용해 차량 충돌 모의실험을 진행했다. 문제는 이때 사용된 인체 모형이 성인 남성의 평균 신체 사이즈만을 기준으로 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제조업체와 디자인팀 인력이 30, 40대 남성으로만 구성됐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차량 충돌 사고에서 에어백의 압력으로 어린이와 여성 운전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용자에 대한 무관심 탓이었다.
자동차 충돌 실험에 사용되는 인체 모형은 1950년대에 처음 도입됐고, 수십 년 동안 평균 신체에 해당하는 남성을 기준으로 했다. 최근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모델은 1976년 제너럴 모터스GM에서 개발한 것으로, 미국 도로교통안전국의 연방 차량 안전 기준에도 포함돼 있다. 이 모형은 키 175cm, 몸무게 77kg인 남성을 표준으로 남성의 근육량과 척추 구조를 반영한다. 하지만 여성 표준으로 쓰이는 모형은 10여 년이 지난 1988년에서야 개발됐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의 연방 차량 안전 기준에 공식적으로 포함된 것은 2000년이었다. 이후 이 모형은 남성 모형의 축소 버전이며,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자동차 업계에서 변화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볼보Volvo는 1995년부터 여성 인체 모형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초 세계 최초로 임산부 모델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 모델은 남성의 축소 버전이 아니라 ‘실제 여성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모형이었다. 볼보는 이후 “모두를 위한 동등한 차Equal Vehicles for All, E.V.A”라는 슬로건 아래 평균 남성 기준에서 배제됐던 이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에게 안전한 차를 만들고자 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하지만 여전히 주요 자동차 회사들은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반영해 모형을 제작하는 대신 사이즈가 작은 남성 인체 모형으로 충돌 모의실험을 한다. 2019년 미국 버지니아대학교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정면 충돌 사고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을 확률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73%나 더 높았다.
자동차 사고와 에어백 사례의 시사점은 명확하다. 기획 단계에서 여러 사용자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많은 이가 당연하게 여기는 기준이 실제 사용자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준점 다시 보기는 바로 이렇게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제품, 서비스, 공간 이용에서 배제돼 온 사람들을 인식하는 일은 포괄적인 설계로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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