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상상 여행자를 위한 안내문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 상상imagination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힘이다. 이 힘은 우리를 ‘지금 이곳’에서 벗어나게 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설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내다본다. 소설가와 영화 제작자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를 탐험하고 창조의 첫 순간에서 우주의 가장자리, 심지어 원자의 심연까지도 여행할 수 있다. 상상은 깨어 있는 낮뿐 아니라 꿈꾸는 밤에도 우리를 찾아온다. 때로는 창의력과 영감으로, 때로는 몽상과 환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만큼 상상은 삶의 기쁨과 성취를 이끌어내는 동시에 고통과 어둠도 불러온다. 하지만 그 어둠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단 한 가지, 상상력
이 안내서에서는 상상의 본질과 성취, 그리고 상상이 빚어내는 고통과 어둠을 함께 탐구한다. 또한 상상의 실체를 밝히기 시작한 현대 과학의 발견을 살펴본다. 오랫동안 상상은 과학의 밖에 머물러 있었지만 최신 과학 기술과 네 가지 혁신적 통찰 덕분에 새로운 탐구의 길이 열렸다. 이 통찰은 인류의 기원, 마음, 뇌를 향한 연구의 최전선에서 탄생했다. 먼저 그 핵심 통찰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상상은 인간 사고의 핵심 특징이다. 우리가 늘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상상의 세계를 끊임없이 방문한다. 미래 가능성을 가늠하고 희미해진 경험을 살리며 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과학이 빚어낸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기도 한다. 때로는 상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기도 한다.
둘째, ‘현실’은 셀 수 없이 많은 가상 세계만큼이나 상상력의 산물이다. 인간의 지각은 단순히 눈과 귀로 들어온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다. 뇌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신호를 해석하고 빈틈을 스스로 채워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신경과학자들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제어된 환각controlled hallucination이라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환각은 무질서한 착각이 아니라, 뇌가 질서를 부여해 만들어내는 조율된 상상이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듯 우리가 보는 법과 듣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세상은 단지 난잡한 빛과 소리의 덩어리로 다가왔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정돈된 현실은 뇌가 끊임없이 추측하고 보정하며 그려낸 결과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 환경과 자기 자신의 경험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경이로운 뇌와 신체의 작용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셋째, 상상과 지각은 지식과 예측, 뇌의 자율적 작용으로 연결된다. 인간은 외부 자극 없이도 능동적인 경험 생성 신경계를 가동해 상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동물도 꿈을 꾸듯 상상을 하는 듯 보이지만, 인간만큼 ‘제어된 상상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여름 해변의 모래 감촉, 피부에 닿는 햇살, 바람결에 실려 오는 짭조름한 내음을 상상하라고 하면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다른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
넷째, 상상은 ‘지극히 사회적인’ 인간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수백만 년의 진화를 거치면서 우리 뇌와 행동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그 결과 우리 인류는 언어와 상징을 활용하는 ‘문화적 생물체’가 됐다. 상징은 우리를 환경과 일정한 거리로부터 분리시킬 뿐 아니라, 마음속 이야기를 타인과 공유하게 한다. 좋든 싫든 우리는 상징을 통해 세상을 바꿔 왔다.
이 책은 이처럼 중요한 상상력을 과학적 관점에서 이해해 보려는 시도다. 과연 상상력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너무 막연하고 종잡을 수 없는 개념은 아닐까? 과학자이자 심리학자로서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이 책에 담았다. 우선 맛보기로 인류가 상상이란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고대 언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자. 언어는 수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 사용하면서 다듬어 온 사고의 도구다. 때문에 언어의 뿌리를 이해하면 인간 사고 체계를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이마고, 이마기노르 그리고 상상
상상의 어원은 인류가 언어를 통해 어떻게 사고를 확장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심상image과 상상이라는 단어는 결합·모방 등을 뜻하는 고대 소리 에임eym에서 비롯됐다. 이 소리는 인도유럽조어부터 현대의 여러 언어우르드어, 러시아어, 영어 등에 이르기까지 약 6,000년 동안 이어져 왔다. 라틴어의 이마고imago는 유사성, 표현, 모방, 나아가 조각상·초상화·배우의 연기뿐 아니라 정신적 표현, 시각 심상, 생각을 뜻한다. 따라서 이마고는 공공 세계의 인공물과 마음속 내면 세계를 연결하는 개념이다. 라틴어 동사 이마기노르imaginor 역시 조각가나 화가가 하듯 심상을 만들어 내거나 구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는 오늘날 망막retinal image, 지각 심상perceptual image 같은 과학 용어에 담겨 있다.
‘심상’이라는 단어는 내면과 외면을 잇는 다리다. 우리는 닮은 사람을 만나면 ‘닮은꼴’spitting image이라고 하고 삶 속에서도 ‘예술적 심상’을 논한다. 심상과 마찬가지로 ‘상상’ 역시 몽상, 실험, 창조의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상상은 이야기를 고안하고, 가설을 세우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상상한다’라는 능동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상상은 언제나 창조 행위다. 상상은 과학 용어가 아니지만 수천 년 동안 집중적으로 사용되며 살아남았고, 이제는 심오한 심리학적 진리를 상징하는 여러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것을 지각하는 능력, 부재하는 것을 지각하는 능력,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을 지각하는 능력, 세상을 폭넓게 이해하는 능력, 창조하는 능력 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다. 상상이라는 개념은 지각·인지·창의성 사이의 상호 연결을 보여준다. 이런 표현 과정은 머릿속에서도, 바깥세상에서도 일어난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리 뇌와 문화, 기원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며, 이 책은 그 길을 보여줄 것이다.
상상을 찾아 떠나는 항해
이제 상상의 바다로 뛰어들기 전, 앞으로 펼쳐질 항해의 개요를 소개한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상상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서 출발한다. 1장에서는 상상이 어떻게 끊임없이 일상 속에 스며드는지를 살핀다. 우리가 회상하고 계획하고 몽상하는 순간마다 상상이 어떻게 얼굴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알아본다. 2장에서는 상상이 예술과 과학의 세계에서 창조적 원천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탐색한다. 소설과 예술의 비유, 상징적 언어, 실험실의 가설 속에서 상상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살펴보고 창조적 사고와 상상의 관계를 조명한다.
2부는 상상의 과학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3장에서는 눈앞에 없는 대상을 마음속에 되살리는 ‘재현적 상상’의 실체를 밝힌다. 우리의 뇌가 어떻게 경험을 재현하고 시뮬레이션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4장에서는 뇌 속에서 상상이 발생하는 신경과학적으로 분석한다. 뇌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활성화되고 과거 경험·기억·예측이 상상을 구성하는지를 다룬다. 5장에서는 상상이 어떻게 진화의 긴 여정 속에서 우리의 일부가 되었는지를 탐구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상상이 단순한 개인적 기능이 아니라, 인간 종 전체의 적응과 발전을 이끈 문화적·생물학적 산물임을 알게 될 것이다. 6장에서는 아동 발달 과정에서 상상력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고 성장하는지를 다룬다. 어린이가 어떻게 상상의 세계를 탐험하는지, 인지·언어·사회성 발달을 이루는지, 그리고 상상력이 평생 학습과 창의성의 기반이 됨을 설명한다. 1~2부를 통해 우리는 상상이 단순한 환상이나 공상이 아니라, 뇌와 문화가 빚어낸 가장 인간적인 능력임을 확인할 될 것이다.
3부는 상상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7장에서는 생생하면서도 두려운 환각의 세계를 여행한다. 환각이 어떻게 우리의 지각을 왜곡하고, 때로는 창의성·영감과 맞닿아 있는지를 탐색한다. 8장에서는 ‘지나친 상상이 불러온 질병’이 어떻게 개인을 사로잡고 파괴하는지를 살핀다. 정신적·신체적 증상 속에서 상상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 위험과 가능성을 동시에 알아본다. 9장에서는 치료와 업무, 의사소통 속에서 심상이 지니는 놀라운 가능성과 위험을 탐구한다. 10장에서는 상상의 양극단에 선 사람들을 만난다. 심상을 전혀 떠올릴 수 없는 아판타시아aphantasia부터 실제 경험에 필적할 만큼 강렬한 심상을 가진 하이퍼판타시아hyperphantasia까지, ‘극단적 상상’의 스펙트럼이 인간 정신의 경이로움과 취약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상상력은 예술가나 과학자 몇몇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일상의 기억과 계획, 꿈과 몽상 속에서 상상력을 끊임없이 사용하지만 그 방식과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선명한 심상을 떠올리지 못해도 창의적인 삶을 살고, 어떤 이는 너무나 생생한 심상 속에 갇혀 고통을 겪기도 한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것의 형태’는 우리의 사고와 감정, 관계와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좌우한다. 상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 안에서 흐르며 가장 은밀하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인간적 체험이다.
이제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 마음이라는 가장 경이로운 우주를 탐험하려 한다. 그 세계를 향해 첫발을 내디뎌 보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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