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그림책을 읽기 전에
어린이를 평생 독자로 이끌어 주세요
인지신경학자이자 아동발달학자인 메리언 울프의 어머니는 평생 특별한 순간에 딱 어울리는 적절한 시를 암송해 분위기를 돋웠다고 합니다. 메리언 울프는 ‘어머니는 어떻게 저 많은 시를 다 외우게 되었을까?’ 궁금했지요. 유대인이었던 어머니는 나치의 압박을 피해 고향도 집도 친구도 모두 잃어버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시를 외우기 시작했답니다. 암송한 시는 평생의 보물이 되어 슬프거나 기쁘거나 함께 할 수 있으니까요.
메리언 울프의 어머니처럼 자녀에게 평생 몸에 가지고 있을 보물을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사랑받았다는 기억을 남겨준다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만 더 바란다면 책을 즐기는 습관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알고, 성찰이 찾아오는 순간의 환희를 안다면 그보다 좋은 삶의 동반자는 없으니까요.
읽기는 평생을 간직할 최고의 유산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필연적으로 조바심이 생깁니다. “왜 우리 아기는 말이 늦을까?”부터 “이웃집 아이는 벌써 한글을 읽는다던데?” 심지어 서너 살 아이를 둔 부모가 “사춘기가 오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에요!” 라고 해서 웃은 적도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부모의 근심도 따라서 커집니다. 그러니 많아야 한둘뿐인 자녀를 위해 과감한 투자를 하는 거겠지요.
어린이가 잘 성장하길 바란다면 책 읽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주세요. 어린이는 신체적인 성장 못지않게 내적인 성장도 필요합니다. 성숙한 독자가 되는 일은 내면의 삶을 가꾸는 일입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마법의 지팡이를 갖는 일입니다. 이 유산은 부모가 읽어주는 그림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배움을 위해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자 고급 독서의 기반을 닦는 일입니다. 어린이가 자라서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바라기 전에 먼저 그림책을 읽어주세요.
저는 성인이 되어 그림책을 처음 만났습니다. 1990년대 중반, 출판사에서 일했는데 마침 한국에서 그림책이 꿈틀대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마츠이 다다시의 『어린이와 그림책』을 읽었고 그림책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마침 양육의 시기와 겹쳐 밤마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열정적인 엄마라서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일하는 엄마로 사는 게 힘들어서 매일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에 나오는 ‘시계탕’에 가고 싶었으며, 그림책을 읽어주다 제가 먼저 잠드는 날도 많았으니까요.
잘 들어야 잘 읽는다
그렇게 시작해서 생각보다 오래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었습니다. 이유는 아이가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종일 보지 않던 엄마가 잠자리에서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온전하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을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기가 부모가 책을 읽어주는 소리를 들을 때 이런 편안함과 충족감을 느낍니다. 이 감정은 모든 아이가 책을 좋아하게 만드는 훌륭한 토대입니다.
그 시절 함께 읽은 그림책을 만나면 지금도 가슴 한쪽이 따뜻해집니다. 하야시 아키코의 『은지와 푹신이』는 은지와 여우 인형 푹신이가 모래언덕으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기차가 잠시 정차했을 때 푹신이가 도시락을 사러 갔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차가 출발했는데 푹신이는 돌아오지 않자 은지가 훌쩍훌쩍 울어요. 알고 보니 기차의 문에 푹신이의 꼬리가 끼어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지요. “어쩌지?” 하며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던 일이 어제인 듯 떠오릅니다.
푹신이를 걱정하던 은지의 마음, 차장 아저씨가 푹신이의 꼬리에 붕대를 감아주는 모습, 개에게 물린 푹신이가 아프면서도 “괜찮아”라고 말할 때 부모와 아이는 함께 걱정하고 슬퍼합니다. 마침내 할머니를 만났을 때 내 일처럼 온 마음으로 기뻐하고요. 이렇게 어린이가 제법 긴 이야기를 몰입할 수 있는 건 부모가 읽어주는 글을 이해하고, 글을 통해 전달되는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학습지를 풀지 않아도 앞으로 학교에서 읽게 될 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차곡차곡 하는 것이죠.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이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어린이의 읽기나 학습에 도움이 될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열심히 읽어주었지만,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어린이가 학습 만화와 유튜브로 갈아탈 때는 더욱 그렇지요.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연구자들이 보여준 결과는 이것입니다. 읽어주는 소리를 많이 들은 어린이가 스스로 잘 읽는 사람이 됩니다. 잘 읽고 이해하기는 모든 학습의 기본입니다.
미래의 독자를 만드는 길
로렌 차일드의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는 어린이가 참 좋아하는 그림책입니다. 오빠 찰리가 편식하는 동생 롤라의 버릇을 재치있게 고쳐줍니다. 아이와 여러 번 읽은 책인데 EBS에서 애니메이션을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아이가 급하게 “엄마, 오늘 이상한 일이 있었어!”라고 하더군요. 찰리와 롤라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신이 났는데 뭔가 개운치 않았나 봐요. “롤라 목소리가 이상해”라고 하는 거예요. 성우의 목소리가 낯설었던 거지요.
엄마가 읽어주는 롤라의 목소리가 진짜라고 믿던 어린이, 엄마가 읽어주는 책에 푹 빠진 어린이는 이야기의 재미와, 그 이상의 것을 배웁니다. 정규교육을 받은 어른은 대략 20만 개 정도의 단어를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1,000개 안팎의 단어를 사용할 뿐입니다. 구어와 문어에서 사용하는 어휘는 이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잘 읽으려면 알고 이해하는 어휘가 풍부해야 합니다. 아직 스스로 책을 읽지 못하는 어린이는 읽어주는 소리를 통해 많은 어휘를 습득합니다. 이는 훗날 스스로 책을 읽을 때 해독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읽어주는 소리를 들을 때 어린이는 말을 할 때는 사용하지 않는, 문법적으로 완성된 아름다운 문장을 만납니다. 『부영이와 보름달』에서 소녀는 아빠를 따라 부엉이 구경을 나갑니다. 추웠지만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아요. 대신 “부엉이 구경을 나가면 조용히 해야 되거든요.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따뜻하게 해야 되거든요.”라고 말합니다. 이런 문장을 들으면 아이는 주인공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됩니다. 공감과 추론능력이 커집니다.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어린이는 책에만 등장하는 단어와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고 이야기의 패턴을 익히며 서서히 읽는 몸을 만들어갑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초등학생이 되었다고 스스로 읽는 게 아닙니다. 갑자기 잘 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독서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모와 교사와 어른이 충분히 즐겁게 읽어주는 그림책을 통해 미래의 독자가 만들어집니다.
(한미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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