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 1874~1942
1953년 봄, 휴전 직전 서울. 틈만 나면 인사동 헌책방에 들러 지적 허기를 채우던 스물네 살 이화여고 교사 신지식申智植, 1930~2020을 손바닥만한 문고판 일본어 책이 사로잡았다. 『빨강 머리 앤赤毛のアン』. 『초록 지붕 집의 앤Anne of Green Gables』을 일본어로 옮긴 것이었다. 홀린 듯 읽던 신지식은 호주머니를 털어 그 책을 샀다. 그는 1960년대 초 이화여고 주보週報 『거울』에 이 책을 번역해 연재했고, 1963년 정식 출간했다. 『빨강 머리 앤』은 그렇게 처음 한국에 소개되어 ‘소녀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정말로 절망 같은 시절이었으니까. 6·25 직후라 부모 잃은 아이, 집 없는 아이······ 불행한 학생이 너무너무 많았지요. 그들에게 내가 위로받았던 『빨강 머리 앤』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는 언젠가 나와의 인터뷰에서 책을 이화여고에 소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책을 번역하면서 완전히 앤이 되었다 나왔어요. 앤을 통해, 그 상상력을 통해 저는 전쟁의 우울함을 극복하고 소생하였습니다.” 그가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맨 마지막 장 「길이 굽어지면」. 친아버지 같은 매슈가 죽자, 앤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교편을 잡기로 결심한다. 마음을 굳힌 앤의 말을 그는 이렇게 번역했다.
“내가 퀸학원을 졸업하고 나올 때는, 내 앞에 길이 똑바로 뚫려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몇 마일 앞까지도 뚫어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지금은 굽어진 모퉁이에 온 거예요. 이 길이 굽어지고 나면,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는 없어요. 하지만 반드시 나는 좋은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앤은 책 읽기를 좋아하는 외로운 소녀들이 즐겨 찾는 친구로 삼는 인물이다. 어린 날부터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책의 맨 마지막 장에서 앤이 읊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피파의 노래」 중 이 문장.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 신지식 선생 번역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신은 하늘에 있고 세상은 모두 평안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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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이야기 속 장소가 실재한다 믿는 사람, 이야기란 허구니 배경 또한 허구라 생각하는 사람. 나는 전자前者였고, 이야기 속 트로이가 실재한다 믿었던 슐리만처럼 언제나 소설 속 장소들을 갈망했으며 그중 어떤 곳에는 반드시 가보리라 결심하곤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인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는 내가 가장 오래도록 마음속에 그려온 곳이었다.
나는 애니메이션보다 책을 먼저 접했다. 열한 살 앤이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친구하기 힘들 것 같아서 빨리 열한 살이 되기를 바랐던 그 아홉 살 무렵부터 나는 앤이 있는 그곳, 애번리, 그린게이블즈, 그러니까 캐나다의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에 가고 싶었다. 사람들이 앤을 좋아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게 앤은 상상력의 결정체 같은 인물이었다. 어린 날 내게는 현실의 고난을 상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두 친구가 있었으니 하나는 빨강 머리 앤이었고, 또 하나는 『소공녀』의 새라였다.
캐나다는 오랫동안 내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나라였다. 밴쿠버도 토론토도 몬트리올도 퀘벡도 아닌, 바로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에 가보고 싶어서였다. 고등학교 때 들었던 영어 동아리를 맡은 원어민 교사가 캐나다 출신이었는데 앤의 나라 캐나다 사람을 만났다는 게 어찌나 반갑던지, 그를 붙들고 꼭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인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
“샬럿타운행 비행기가 곧 출발하니 승객 여러분은 모두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몬트리올 공항에서 환승을 기다리던 영어와 프랑스어로 이 문장을 들었을 때 ‘샬럿타운’이라는 단어에서 잠시 꿈속에라도 있는 듯 어리둥절했다. 소설에서 일종의 ‘읍내’로 그려지는 곳, 시골 마을 에번리에 비해 번화한 대처로 묘사되던 그 샬럿타운에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마침내 그 섬,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의 땅을 밟았을 때, 아, 내게도 이런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그려왔다.
수년 전 『빨강 머리 앤』을 국내에 처음 번역해 소개한 아동문학가 신지식 선생을 인터뷰하러 덕에 갔을 때, 선생이 보여주시던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사진을 보며 반드시 가보리라 마음을 다졌을 때나, 연수 와서 여행 계획을 짜면서 각종 블로그에서 이 섬 여행기를 읽을 때도, 나도 꼭, 이 땅의 붉은 흙을 밟아보아야지, 했다.
제이미와 나는 공항에서 차를 빌려 섬 탐험에 나섰다. 푸른 잔디 위에 노란 민들레가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나는 예쁘다며 감탄하는데 제이미는 “잡초지. 뭐They are weeds”라며 시큰둥하다.
“아니야. 꽃이야.”
“잡초라니까.”
“한국에서 민들레는 예쁜 꽃이야.”
“미국에선 그냥 잡초라고.”
몇 번을 반복하며 옥신각신하다가 둘이서 그냥 웃어버렸다.
재미 교포 2세인 제이미는 내 사촌언니의 이종사촌 여동생으로, 우리는 지난겨울 맨해튼 코리아타운에서 디저트를 먹던 중 둘 다 ‘빨강 머리 앤’의 광팬이란 걸 알고선 이 여행을 함께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섬의 흙은 신기하게도 붉다. 초등학생 때 TV에서 방영했던 일본 애니메이션에 묘사된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풍경처럼 붉고, 중학생 때 보았던 캐나다 드라마 「빨강 머리 앤」에서처럼 붉다. 그 붉은 흙 위에 예쁜 집들이 그림처럼 서 있다.
“And what DOES make the roads red?”
“이 길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붉은 거죠?”
그린게이블즈Green Gables로 가는 길에 앤이 매슈에게 던졌던 질문이 저절로 떠오른다.
6월이지만 섬은 춥다. 우리가 머무른 3박 4일 중 그나마 첫 이틀이 최고기온 16~18도 정도로 ‘따뜻’했고, 나머지 이틀은 최고기온 8~9도의 겨울 날씨였다. 이 섬의 성수기는 7~9월, 1년 중 딱 석 달이다. 어쨌든 우리는 앤이 고아원을 떠나 처음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에 도착한 그 계절, 6월 초순에 그 섬에 있었다. 매슈의 마차를 타고 그린게이블즈로 향하던 앤을 전율에 떨게 했던 아름다운 길, 사과꽃으로 뒤덮인 그 ‘기쁨의 하얀 길White way of Delight’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Overhead was one long canopy of snowy fragrant bloom. Below the boughs the air was full of a purple twilight and far ahead a glimpse of painted sunset sky shone like a great rose window at the end of a cathedral aisle.
머리 위에는 눈송이 같은 향기 나는 꽃들이 기다란 차양을 이루고 있었다. 가지 아래에서 대기는 자줏빛 황혼으로 가득했고 저 먼 곳에서는 붓으로 칠한 것 같은 해질녘 하늘 한 자락이 대성당 통로 끝자락의 커다란 장미창처럼 빛나고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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