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등 대합실에 울린 만세 소리
신동윤
여러분은 고향이 돌아가면 한국 독립 만세를 절규하라!
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패전국을 어떻게 처리할지, 앞으로 무슨 수로 평화를 유지할지 논의가 필요했고 세계열강은 파리에 모여 강화회의를 개최했다. 그런데 여기에 참여할 핵심 국가 미국은, 전쟁의 승패가 판가름 날 무렵부터 흥미로운 주장을 해왔다. 한 민족의 운명은 그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였다.
전쟁은 왜 일어날까, 국민 동의 없이 정부가 혼자 결정해서 그런 게 아닐까. 국민 동의로 정부가 운영된다면 전쟁을 시작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 만약 지구에 국민 동의로 수립된 나라들만 있다면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그러려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양상은 사라져야 한다. 각 민족의 의견을 존중해 나라를 세우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민족자결주의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인류 평화의 방법을 숙고한 나름의 결과였다.
이러한 미국의 의중은 1918년 11월 상하이를 방문한 미국 특사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을 통해 한국인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를 방문한 여운형에게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국내외에서 독립 의사를 표시한다면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조언한 것이다. 여운형은 동지들과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에게 파리에 대표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 더불어 재일 유학생들과 접촉해 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이 이뤄졌으며, 국내에도 긴밀한 연락을 취해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 중심의 만세 시위 운동 지도부가 꾸려졌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장례 참여 인파가 서울로 몰려든 이때, 거센 파도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난 1919년 3월 17일, 한 남자가 남대문역에 들어섰다. 1922년 경성역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곳엔 남대문역이 위치했다. 오늘날 서울역 자리다. 경성역이 세워지기 전에도 남대문역은 서울의 관문으로 기능했고 늘 사람이 북적였다. 1919년 3월 1일부터 고종 장례식이 있던 3월 3일까지 시기엔 하루에 1만 명 넘게, 많게는 2만 5,000명이 넘는 인파가 남대문역을 거쳐 갔다.4 남자가 들어선 3등 대합실에는, 유관순처럼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져 고향으로 내려갈 기차를 기다리는 학생들도 많았으리라.
그의 이름은 신동윤. 평안남도 강서군 성암면 주산리에서 태어났고, 당시엔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 만하리에 살고 있었다. 36세의 천도교 신자로, 회사絵師 즉 그림을 그려 먹고사는 화가였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가 참여한 33인의 조선 독립선언 소식을 접한 그는 3월 3일 개성 만세 시위에도 참여했다. 판결문을 보면, 3월 3일경 신동윤이 군중과 함께 한국 독립 만세라 외치며 헌병분대와 경찰서로 몰려가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동을 했다는데, 일제 측 보고서엔 같은 날 개성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던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군중 1,000여 명이 경찰서로 함께 몰려간 일이 실제로 있었고, 일몰 후에도 약 2,000명이 경찰서와 파출소에 가서 돌을 던져 유리창이 깨진 일이 있었다고 적었다.5 신동윤은 3월 3일 개성 만세 시위에 참여한, 이름 모를 군중 속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독립을 외쳤건만 조선총독부는 건재했고 조선 독립은 요원해 보였다. 신동윤은 이렇게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서울, 개성 같은 커다란 도시뿐 아니라 저 멀리 시골에서도 독립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이어져야 무언가 변화를 불러일으킬 거라 보았다. 신동윤이 이날 남대문역을 간 게 계획적인 건지, 일정상 우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고민을 품고 있던 건 분명했다. 1919년 3월 17일, 신동윤은 남대문역 3등 대합실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여러분은 고향에 돌아가면 한국 독립 만세를 절규하라! 각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자가 없다면 한국의 독립은 기약할 수 없다!
신동윤의 목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곧 경찰이 달려들었다. 3월 1일부터 계속된 독립 만세 소동에 잔뜩 긴장한 경찰은 재빨리 대응했다. 그럼에도 신동윤은 거칠게 저항하며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체포되는 순간까지도 ‘한국 독립 만세’를 절절히 부르짖었다고 한다.
이 일로 신동윤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1919년 5월 22일부터 1920년 4월 28일 사면되기까지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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