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권
저는 도시학, 그중에서도 도시설계를 전공했습니다. 도시 설계를 크게 둘로 나누자면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도시설계가 있고, 오래된 도시를 잘 돌보거나 지키고 되살리는 도시 설계가 있어요. 제 전공은 뒤엣것입니다. 말하자면 재생하는 도시설계, 보존하는 도시설계라고 할 수 있어요. 전통적으로 개발 쪽이 인기가 좋아요. 돈이 많이 몰리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옛 도시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 장소가 개발에 밀려 우리 기억에서 지워지는 게 슬펐습니다. 우리 도시는 오래 함께 지낸 친구와 우정이 깊어지듯이, 그 안에서 역사를 기억하고 체험할 경험을 주지 못해요. 그전에 무너뜨리고 새로 짓습니다. 아파트만 해도 30년도 채 안 돼서 새로 짓습니다. 재개발 사전 단계인 안전 진단에서 불합격 결과를 받으면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붙어요. 내가 사는 곳이 안전하지 않다는 걸 환영하는 거예요. 그래야 새로 짓고 집값을 올려 받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개발 시대가 남긴 도시 풍경
저는 1994년에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서울연구원에 들어가서 서울 도시설계 연구를 13년간 했어요.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북촌과 인사동 연구입니다. 당시 북촌 한옥마을을 전부 재개발할 상황이었어요. 주민 간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개발에 찬성하는 쪽도 있었지만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분들도 있었어요. 결국 서울시장이 우리 연구원에 연구를 의뢰합니다. 2000년 한 해 동안 꼬박 북촌 한옥마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연구했어요.
주민 설명회를 세 번 했는데, 첫 번째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번은 무산됐어요. 워낙 갈등이 심해서 저도 여러 번 멱살을 잡혔습니다. 주민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절반은 그래도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다만, 그동안 서울시가 규제만 하고 한옥에 사는 주민들의 삶을 돌보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지원을 좀 해 달라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절반은 문화재고 뭐고 일절 간섭하지 말라는 개발주의의 입장이었습니다. 한옥을 철거하고 그 위에 빌라를 짓든 아파트를 짓든 서울시는 개입하지 말라는 입장이었어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울연구원도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하다가, 서울시에 ‘한옥 등록제’를 제안합니다. 주민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주민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등록된 한옥은 시에서 개보수 비용을 지원합니다. 외관을 고친다면 3000만 원까지 보조금을 주고, 내부는 2000만 원까지 저금리로 돈을 빌려 줬어요. 조건은 한옥의 현재 외관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부는 현대식으로 바꿀 수 있게 했어요. 서울시가 이 방안을 채택하면서 많은 주민이 등록을 택했고 한옥이 보존됐죠.
한계도 있었습니다. 북촌 한옥이 세상에 알려지고 주목을 받으니까 집값이 올라갑니다. 그러자 돈 많은 외지인들이 한두 채씩 사들여서 주말 별장처럼 씁니다. 평일에는 빈집들이 생겨요. 불 꺼진 한옥이 텅 비어 있는 유령의 마을처럼 되어 버립니다. 또 하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에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주변 임대료가 올라가고 이를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떠나 다시 한옥마을을 떠납니다. 북촌이 관광지로 주목받으면서 밀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이 이 지역을 떠나는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 현상도 일어나죠. 그래서 지금은 관광객의 야간 출입을 막고 있어요. 도시 관련 연구를 하면서 수도권, 특히 서울은 이처럼 도시 개발 관련 갈등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이후로도 제가 도시 관련 연구를 쭉 해 왔는데, 요즘은 지방 소멸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구 위기와 관련이 깊죠. 젊은이들이 결혼을 기피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안 낳는 경향이 많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시대착오적 개발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어요. 소위 말하는 선진국 도시들은 개발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의 모습이 되었어요. 새롭게 도시를 개발하다가 이제는 낡은 도시를 탈바꿈시키는 재생 시대를 맞고 있죠. 우리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지만, 그들과 달리 여전히 개발 시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지금도 모든 정책이 개발 위주로 돌아갑니다.
부수고 새로 짓겠다는 1960~70년대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어요. 이제는 고질병에 가깝습니다.경쟁과 입시 위주의 교육 시스템과 비슷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정책을 내놓아도 그때뿐이죠. 사람들이 변화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내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면 기울어진 운동장이든, 사교육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녀 교육비가 엄청나게 상승했죠. 웬만한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예요. 부동산도 그렇죠. 개발하다 보니 집값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습니다. 성실하게 일해서 내 집 마련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워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겠습니까?
제2공화국 장면 선생의 국토 개발 구상
우리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자는 의미에서 해외로 눈을 돌려 보겠습니다. 시야를 조금만 넓혀도 우리가 대단히 불친절한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도시의 주인은 당연히 사람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닙니다. 자동차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어요. 보행자는 이리저리 차를 피해 다녀야 하고 아이들은 안전을 위협받으며 학교에 갑니다. 여기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는 그렇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해요. 우리는 이미 선진국입니다. 하지만 사는 모습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보다 가난해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과 도시들이 많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세계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곳 시민 중 공공 임대 주택에 사는 사람이 60% 이상이에요. 공공 임대 주택이나 사회 주택이 활성화되어 평생 안심하고 살 수 있어요. 우리처럼 재개발하고 집값이 뛰고 쫓겨나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런 주거 정책이야말로 ‘살고 싶은 도시’의 토대라고 할 수 있어요. 아무리 시설 좋고 풍경이 아름다워도 살 데가 없다면 그림의 떡에 불과하겠지요. 그런데 유럽 대부분 나라가 빈처럼 공공 주택 비율이 높습니다. 15~30% 비율인 걸로 알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한 자릿수에 못 미칩니다. 턱없이 부족한 셈이죠. 우리는 여전히 집을 거주의 대상이 아닌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과거 대규모 토목 공사로 큰돈을 벌던 개발 시대의 유산이죠. 정부 정책 또한 이를 부추기고 있고요. 부동산 영역에서 공공적 가치가 훼손된 데는 하나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1997년 겨울에 발생한 IMF 구제금융 사태요. 이는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큰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었다고 봐요. 당시 국가가 부도나면서 공공 영역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윤의 논리가 사회 전반에 퍼져 나갔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돈 버는 것도 좋지만, 함께 먹고살자는 공동체 의식이 있었습니다. 세금 걷어서 힘든 사람들 도와주는 게 당연했어요. 그래서 공공 임대 주택도 짓고 민간 건설사가 짓는 아파트 단지에도 장기 임대 주택을 꼭 지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IMF 사태를 기점으로 완전히 수익 창출 수단으로 바뀌어 버렸죠. 사람들은 남 챙길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부터 잘살고 보자는 인식이 깊이 각인되고 말았어요. 부동산 문제, 지방 소멸 문제는 뒷전으로 몰려났고, 그런 무심한 마음들이 지금 우리 도시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우리가 1960~70년대식 사고에 머물러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렇다면 당시로 돌아가 우리나라 도시가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들어섭니다. 이때 장면 정부는 전반적인 국토 개발 계획을 세워요. 이를 주도한 분이 훗날 박정희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운 장준하 선생입니다. 「사상계」를 창간한 분이죠. 이분을 영입하려고 당시 장면 총리가 몇 번이고 찾아갔어요. “당신은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농촌이나 도시나 모두 살기 힘들다. 그러니 국토를 개발해 잘 살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달라” 이렇게 부탁한 겁니다.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국토는 한국 전쟁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상태였어요. 결국 1961년 2월 장준하 선생은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맡습니다. 그의 첫 번째 구상은 선先 농업 발전, 후後 공업화였어요. 일본, 대만, 이스라엘, 미국처럼 1차 산업의 기반을 단단히 해서 농촌을 잘살게 한 다음에 공업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전국 대졸 미취업자가 1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중 2000명을 선발해서 전국으로 보냅니다. 이들에게 지방 사정을 파악하게 하고, 중앙으로 불러서 교육한 다음에 내려보내 적어도 2년씩은 군수를 시킬 예정이었어요. 완전히 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자는 계획이었는데, 그해 5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중단되어 버렸죠.
박정희 정부는 국토 건설단 인원들을 검증된 엘리트로 채우려던 계획을 바꿔, 병역 미필자 또는 불량자 등을 뽑아다가 공사 현장에 투입했어요. 그러고는 선先 공업화로 방향을 바꿉니다. 박정희 정부의 국토 개발은 한마디로 속도전이었어요.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했습니다. 사회 각 영역이 성과 위주와 개발주의적 사고에 지배당합니다. 대표적인 게 ‘성장 거점 개발론’이었습니다. 각 지방을 골고루 개발하는 게 아니라, 서울과 부산 같은 대도시 위주로 갑니다. 공업화와 대기업 키우기 전략을 쓰죠. 그 결과 단기간에 큰 빠른 성장을 이룹니다. 하지만 부작용도 엄청났죠. 오늘날 우리는 격차와 편중, 그리고 불균형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편법으로 고도 성장을 했지만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거예요.
많은 나라가 개발 시대를 지나 재생의 시대로 가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도 멀쩡한 동네를 부수고 초고층 아파트를 지어요.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죠. 우리 사회 전반에 개발주의자들, 특히 토목 건설 기득권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웬만한 언론사, 방송사 소유자가 건설사라는 점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계속해서 부동산 개발을 부추기는 기사가 쏟아집니다. 인구는 갈수록 줄어드는데 계속해서 신도시 짓자고 하고, 지방 대도시는 미분양 사태가 속출하는데도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에요. 인구는 줄고 청년은 살 곳이 없는데 빈집은 늘어납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우리가 본질을 꿰뚫어 볼 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혀 온 고질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도시의 풍경에서 만나는 개발주의의 폐해는 무엇이 있을까요?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