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세 개의 바다를 건너
1943년
1
이제 바다 한 개만 더 건너면 화태였다. 왓카나이 항구에서는 화태로 가는 아침 배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홋카이도 북쪽 끝의 왓카나이와 화태의 오도마리항을 오가는 연락선은 하루 서너 차례 운항했다. 조선 사람들이 주로 묵는 부둣가 여관은 외양부터 허름했다.
두 개의 바다를 건너서 이곳에 다다른 단옥네도 그 여관에서 하룻밤 묵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처음 타본 배와 기차에 단옥네는 온 식구가 돌아가며 멀미에 배탈을 앓았다. 단옥네는 누구랄 것 없이 죄다 서리 맞은 호박잎꼴로 왓카나이에 도착했다. 여자들 방엔 단옥과 엄마 덕춘, 22개월 된 동생 영복 외에도 여섯 명이 더 잤다. 단옥네처럼 아버지나 남편, 아들을 찾아 화태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로 꽉 찬 방은 돌아눕기도 어려울 정도로 비좁았지만 덕분에 춥지 않게 잘 수 있었다. 북쪽으로 올수록 계절이 거꾸로 가는 듯 점점 더 추워졌다.
단옥은 음식 냄새에 잠에서 깼다. 빈 뱃속이 요동을 쳤다. 코를 킁킁거리던 단옥은 벌떡 일어났다. 변소와 세면장 앞에서 줄 서느라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면 남보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 먼저 깨서 나간 사람들 덕분에 방이 조금 널널해졌다.
지난밤, 늦잠 자면 두고 갈 거라고 겁주던 엄마는 아직 자고 있었다. 잠결에 영복에게 젖을 물렸었는지 가슴이 드러난 채였다. 엄마와 누나 사이에 끼어서 갑갑해하던 영복도 네 활개를 펼친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단옥은 셋 중 가장 먼저 일어난 것에 만족감을 느끼며 엄마와 영복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방을 나서니 아래층 부엌에서 올라오는 우동 냄새에 침이 괬다. 단옥네는 집에서 가져온 미숫가루와 볶은 콩을 아껴가며 먹고 있었다. 그마저도 먹을 것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옥은 우동 냄새라도 실컷 맡으려다 더 허기가 져 코를 움켜쥐었다. 일 층 남자들 방에서 잔 성복도 음식 냄새에 깼을 것 같았다. 오늘은 오빠한테 놀림받는 일 없게 해야지. 단옥은 어제 기차에서의 일이 아직도 약이 올랐다.
“오빠, 사람들이 뭘 모르겠다고 자꾸 와카라나이, 와카라나이 하는 겨?”
기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던 단옥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와카라나이’는 모르겠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의 일본말인데 사방에서 그 말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많이 하던 말이라 더 궁금했다.
“일본말 안다고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그것도 몰러? 엄니, 얘 학교 헛다녔슈.”
성복이 대답 대신 엄마에게 고자질하듯 말하자 단옥은 자존심이 상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지지배가 입만 살아서는.”
엄마까지 거들자 단옥은 분한 마음에 성복을 노려보았다. 단옥이 아니라 옆자리 일본 남자 눈치를 슬쩍 본 성복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와카라나이가 아니라 왓카나이라고 하는 거잖어. 다음 역이 왓카나이라구.”
일본 남자는 조선말로 말하는 단옥네 가족을 무시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무안했던 단옥은 이제 왓카나이는 평생 잊지 않을 것 같았다.
단옥은 변소에 가서 밤새 참았던 오줌을 시원하게 쏟아내고 세면장으로 갔다. 어젯밤 물수건으로나마 몸을 닦았기에 오늘은 세수만 하면 됐다. 단옥은 얼굴을 닦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잔뜩 마셨다.
단옥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막 일어난 듯한 엄마는 황급히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방엔 엄마와 영복뿐이었다. 덕춘은 딸을 보자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영 잠이 안 와서 밤새 못 자다 깜빡 잠들었네.”
천둥처럼 울리던 엄마의 코 고는 소리가 떠오른 단옥은 어이가 없었다. 입바른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겸연쩍어하는 엄마의 표정에 말을 바꿨다.
“지는 이제 옷 갈아입으믄 되쥬?”
덕춘이 씻으러 간 뒤 단옥은 발치 아래 두었던 보따리를 가져다 매듭을 끌렀다. 오늘을 위해 맨 아래에 모셔뒀던 저고리와 버선을 꺼냈다. 할머니가 새로 지어준 것들이었다. 속바지와 치마는 입고 있던 그대로였지만 저고리를 갈아입은 것만으로도 새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단옥은 목깃이 까매진 낡은 저고리를 다시는 안 입을 것처럼 대충 접어 보따리 안에 넣었다.
덕춘이 영복을 씻기기 위해 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단옥은 엄마가 새 저고리를 입은 자신에게 좋은 말 한마디쯤 해주길 바랐지만 덕춘은 성복을 궁금해했다.
“근디 니 오라비는 어째 기척이 없냐?”
단옥도 이상하던 차였다. 한편으로는 오빠가 늦잠 자서 허둥대는 꼴을 보고 싶었다.
지난 열흘 동안 성복은 늘 가장 먼저 움직이며 식구들을 인솔했다. 집에서와는 딴판인 모습에 오빠를 달리 봤었는데 어제 일로 점수를 까먹었다.
“지가 가볼게유.”
발딱 일어난 단옥은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허름한 행색을 한 일본 사람 두어 명이 부엌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단옥은 자기도 모르게 자꾸 눈이 가는 걸 참으며 남자들 방문을 두드렸다. 오빠를 놀려줄 생각에 비시시 웃음이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온 중년 남자가 “네가 주성복이 동생이냐?” 하고 물었다.
“야.”
단옥의 대답에 남자는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쪽지를 꺼내 건넸다. 성복이 맡기고 간 거라고 했다. 단옥은 어리둥절한 채 종이를 펼쳐보았다. 자신은 화태에 가지 않기로 했다며 일본 본토에서 돈을 벌어 효도하겠으니 불효자를 용서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단옥이 멍하니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자 남자가 물었다.
“일본 글을 모르는구나. 내가 읽어주랴?”
종업식을 2주 남기고 집을 떠났으니 단옥은 3학년을 마친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여자 부반장까지 했던 자신을 글자도 모르는 아이로 보다니. 단옥은 발끈해서 대꾸했다.
“지도 읽을 줄 아는구먼유.”
단옥이 잠시 멍했던 건 오빠가 떠났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도우시테모 와카라나이.”
단옥은 “도무지 모르겠어” 하고 중얼거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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