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서문
인류학은 언제나 늦되기 마련이다. 현지조사를 시작한 시점부터 출판물로 손에 쥐기까지는 수년, 때로는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인류학자의 현지조사 기록이자 분석적 보고서인 에스노그라피는 세상에 나오는 순간, 이미 과거를 다룬 역사서가 되어버리곤 한다. 여기에 번역이라는 과정까지 더해지면, 현지조사 당시의 언어와 시대적 맥락으로부터는 더욱 멀어진다. 인류학의 ‘시차의 글쓰기’는 현장을 너무 천천히 포착하고, 현장보고서를 너무 늦게 세상에 소개한다. 이 책 《이주, 경계, 꿈: 조선족 이주자의 떠남과 머묾, 교차하는 열망에 관하여》도 예외는 아니다. 2004년부터 2016년까지 연변을 오가며 보고 듣고 생각했던 기록들이 2025년이 되어서야 한국어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연구는 2004년 여름, 서울 홍제동 의주로교회에서 추방 위기에 몰려 있던 미등록 조선족 노동자들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연변과 중국 동북의 마을 및 대도시, 그리고 한국 곳곳의 조선족 동포들, 가족들, 연구자들, 활동가들과의 반복된 만남 속에서 형성된 공동작업의 산물로 완성되었다. 또한 이 책은 지난 25년간 내가 몸담아 온 여러 대학에서의 대화와 비판, 훈련과 우정 속에서 다듬어진 지적 산물이자, 특정 시기의 연구 흐름과 분석 경향을 반영하는 시대의 기록이기도 하다. 연구를 시작한 지 20년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진 한국어 출간은 아쉬우면서도 안도가 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부끄러운 시간의 결정체이다.
그렇다면 이 가깝고도 먼 조선족의 이야기를 2025년의 시점에서 다시 읽고, 다시 질문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 너무 익숙해져 낡아 보이고, 너무 자주 다루어져 철 지난 주제처럼 여겨지는 조선족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논의를 할 수 있을까. 조사 시점과 출간 시점 사이의 시차를 이 책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한국과 중국이, 북한과 중국이, 혹은 한국과 북한이 축구를 한다면 어디를 응원하겠는가?” 조선족들이 농담처럼 자주 던지는 이 질문은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민족과 국가의 경계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을 응축한 핵심적인 정체성 질문이다. 각자의 대답은 다르지만, 이 질문의 저변에는 민족적 애착, 국가적 소속감, 그리고 그 사이의 균열과 중첩이 존재한다. 여러 학술 발표에서 내가 자주 받았던 질문, “조선족은 한국인인가, 중국인인가?” 역시 마찬가지다. ‘조선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지만, 이러한 질문은 종종 단일한 국가 정체성으로만 답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언제나 제 3의 답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자 한국의 재외동포다”라고 답할 때, 그들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함경북도 억양은 다시금 북한과의 연관성을 묻게 한다.
이처럼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개인과 집단, 사회가 시간 속에서 축적해온 관계망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답변을 요구한다. 질문이 던져진 바로 그 순간의 고정된 대답 너머를 준비해야 한다.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 첫머리에 서 “내게 누구냐고 묻지 말라. 내가 대답하는 순간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듯,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 재구성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성과 복잡성을 지운 채 단순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을 껴안으면서,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구술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대신 “우리는 어디에 놓여 있는가”라고 묻는 순간, 관계의 지형 속에서 새로운 말문이 열린다. 그런 점에서 조선족의 이야기는 결코 종결된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민족과 국가, 식민과 냉전, 젠더와 계급, 자본과 노동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현재진행형의 서사다.
2004년 의주로교회에서 만난 조선족 노동자들은 “10년 안에 중국이 한국을 앞설 것”이라며 중국의 부상을 자신 있게 예언하곤 했다. 어떤 이들은 한국 사회의 차별에 당당히 맞섰고, 어떤 이들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이들의 복합적인 감정과 사회적 위치는 단일한 국가 정체성만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19세기 말, 가난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연변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1949년 중국 정부에 의해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으로 공식 인정받았다. 이들은 사회주의 교육과 중국식 사회화 과정을 거쳐 중국의 공민이자 소수민족으로 자리 잡았고, 냉전기에는 한국과의 연결이 단절되었지만,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 사회로 진입해 ‘코리안 드림’을 좇는 대표적인 이주노동자 집단이 되었다.
이 몇 줄로 요약된 조선족의 이주 경로—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 재외동포에서 이주노동자로—는 단일한 민족적·국가적 정체성 너머에 놓인 계급적 위치, 식민과 냉전의 역사, 그리고 법적·사회문화적 경계들을 품고 있다. 조선족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로 이주했지만,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과는 구별되는 법적·문화적 위상을 갖고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 책은 그들의 이야기와 시간을 늦되게 따라가며, “지금 여기”에서 다시 물어야 할 질문들을 꺼내 놓는다.
첫째, 이 책은 ‘꿈의 시간성’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2004년 교회에서 만났던 조선족 노동자들은 중국의 경제적 부상을 예상했고, 한국 사회에서의 배제와 어려움 속에서도 ‘코리안 드림’을 굳게 믿고 혼신의 힘을 다해 실현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 현지 조사를 마치고 이 책의 집필을 마무리하던 2016년 무렵에는, 중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조선족 사회에서 코리안 드림에 대한 회의와 후회, 망설임, 그리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다. 책의 후반부에서 다룬 ‘코리안 드림에 대한 재해석’은 하나의 꿈이 등장하고, 성장하며, 쇠퇴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일종의 ‘꿈의 생애사’를 보여준다. 조선족의 코리안 드림은 연변이라는 지역성이나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배경에 국한되지 않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주노동과 국제 이동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꿈은 개인의 감정이나 환상일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조건 속에서 특정한 경로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적 동력이다. 이 책은 조선족의 사례를 통해 이주의 꿈이 어떻게 탄생하고 재구성되는지를 조망하고자 했다.
둘째, 이 책의 영어 제목은 Borderland Dreams: The Transnational Lives of Korean Chinese Workers, 직역하면 ‘초국적 조선족 노동자의 삶’이다. “초국적”이라는 개념은 국가 간 이동을 강조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조선족의 이동은 단순한 국경의 횡단을 넘어선 보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경계 넘기”의 실천이다. 연변에 불어닥친 ‘한국바람’은 농촌에서 도시로, 연길에서 베이징·상하이, 나아가 도쿄·뉴욕·로스앤젤레스까지 이어지는 연쇄적 이동과 순환을 가능하게 했다. 이 흐름 속에서 부모가 한국에서 보낸 ‘한국 돈’은 자녀가 중국 도시에 정착하거나 더 멀리 이주하는 데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고, 이는 지역 간, 계층 간, 젠더 간, 민족 간, 세대 간 횡단의 기반이 되었다. 조선족의 이주는 국가 간 초국적 이동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농촌과 도시, 주변과 중심, 교육과 노동, 가족과 자본이라는 다층적 경계를 넘나들며 구성된 복합적 실천이다. 이 책은 조선족이 경험한 이 같은 횡단적 이동이 어떻게 물질적·정서적·계급적으로 중첩된 토대를 형성하고, 고정되지 않은 새로운 주체를 구성해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조선족의 이주는 기존의 경계를 넘나들 뿐 아니라, 새로운 경계를 만들면서 이동하고 재구성되며, 이주자의 삶을 다층적으로 확장시키는 하나의 사회적 실험장이 된다. 이 책은 그러한 경계성과 횡단의 역동성을 추적한다.
셋째, 이 책은 에스노그라피라는 장르가 지닌 현재성의 문제와 재현의 윤리를 성찰한다. 앞서 언급했듯, ‘시차의 글쓰기’로서의 에스노그라피는 단순히 조사 시점과 출간 시점 사이의 시차만이 아니라, 듣기와 쓰기 사이의 시차, 말한 자와 기록한 자의 시차, 그리고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았으나 그 순간에 존재했던 감정과 맥락 사이의 시차까지도 품고 있다. 이러한 중첩된 시차 속에서, 뒤늦게 발표되는 에스노그라피는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이야기를 다시 불러내고, 그때의 언어와 지금의 언어를 넘나들며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담는다. 이는 단지 과거를 재현하고 분석하는 학술 작업일 뿐 아니라, 그때의 목소리를 지금 어떻게 다시 들을 수 있을지를 끈질기게 묻는 윤리적 청취의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이주, 경계, 꿈》은 과거에 머무는 책이 아니다. 계속해서 다시 듣고 다시 쓰게 하는 책이다. 시차를 넘어 지금 여기에서 다시 말을 거는 에스노그라피의 현재형 실천이다.
이 책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긴 시차를 품고 나온 이 책의 부족함과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너머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가는 일 역시 나에게 주어진 몫이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내가 영어로 쓴 책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이 책은 ‘중층적인 번역의 과정’과 ‘시차의 글쓰기’ 그 자체다.
(중략)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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