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돌봄과 치료
이상한 나라의 임상심리사
나는 임상심리학의 원리주의자였다.
하나, 상담이 주 업무일 것.
둘,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급여 수준.
셋, 지역은 상관없음.
2009년 말, 27세를 코앞에 두고 구직을 시작하면서 세 가지 기본 방침을 정했다. 27세라 하면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죽었을 때 나이다. 그가 기타의 신으로 칭송받던 나이에 나는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좀 뒤늦게, 아니,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에 사회로 진출하려 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학부 4년, 대학원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고통을 인내하며 공부와 연구에 매진한 결과 마침내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논문을 쓰고 박사 호칭을 손에 넣은 것이다.
“논 자취는 없어도 공부한 공은 남는다.”라는 말이 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자주 중얼거렸던 말이다. 밤늦게까지 연구실에서 홀로 논문을 쓸 때나 담배 피우러 밖에 나갈 때, 그리고 화장실에서 멍하니 소변을 볼 때 “공부한 공은 남는다.”라고 혼잣말을 했다.
결국에는 더할 나위 없이 큰 공을 거둔 셈이라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열반에 이르면서 도원경을 발견하고, 그와 동시에 운석 충돌까지 목격한 것과 비슷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열반에 도달한 박사도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계속 대학원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딘가 신세계를 찾아야 했다. 겨우겨우 공을 세워도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삶은 계속된다Life goes on.’라는 말처럼.
주위의 성실한 박사들은 조용히 구직 활동에 착수하고 있었다. 지도교수의 신통력에 기대든지 공채에 도전하든지 방법은 다양했지만, 모두들 대학 교수나 연구원 등 학계와 관련된 일자리를 찾았다. 당연하다. 로스쿨에 붙은 사람이 요리사 자리를 찾거나,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이 프로축구 구단의 스카우트를 기다리진 않으니까. 박사가 되면 학계에서 일한다. 그것이 왕도, 아니 ‘박사도’다.
그렇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나는 ‘임상심리학’이라는, 마음의 문제를 겪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학문을 배웠다. 그런 학문을 갈고닦은 박사가 현장에서 일하지도 않고 젊을 때부터 대학교에서 가르치기만 한다니, 극도에 달한 타락이라고 나는 열을 올렸다. 진정한 임상심리학도라면 연구실이 아니라 상담실에서 일해야 마땅하다고 나는 외쳐댔다.
황금기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나는 박사 논문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완전히 임상심리학 원리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나를 주위 사람들은 냉담한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그래도 은사님이나 친구 같은 친절한 사람들이 대학에 취직하길 권해주었다.
“대학교가 나을 거야. 인생은 기니까.”
그렇지만 그처럼 깊은 지혜가 담긴 충고를 나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나는 일류 상담사가 되어서 궁극의 임상심리학을 연구하겠어!”
열반에 도달하여 법열을 느끼고 있던 전성기의 박사는 사자처럼 포효했다. 그리고 구직을 시작했다.
채용의 바다에 좌초하다
출항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나는 곧장 좌초했다. 바다에 나가지도 못했다. 구직을 시작했지만 전혀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일이 없지는 않았다. 구글에서 ‘임상심리사 구인’ 등을 검색해보면 전국 방방곡곡에 일자리가 있었다. 일자리 자체는 있었지만 내가 정한 세 가지 방침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일단, 대부분이 비정규직 구인으로 시급 1000엔 전후인 일들이 많았다. 1500엔이면 그나마 높은 수준이었다. 드물게 정규직 모집이 있어도 거의 전부 월급이 20만엔도 안 되었다.
‘이게 뭐야! 이 돈으로는 도저히 먹고살 수 없어!’
나는 당시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었다. 먹고살려면 어느 정도는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구인 공고마다 두 번째 방침인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급여 수준’과 부딪혔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임상심리사가 유행해서 “앞으로는 마음의 시대이니 상담사가 되면 먹고살 걱정은 전혀 없다.”라고들 했다. 나는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는 게 특기라 순전히 ‘그렇군! 내가 잘 선택했어!’라며 마음 놓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임상심리사가 유행하며 자격자가 범람한 탓인지, 애초에 심리적 지원이라는 일 자체의 한계인지, 그때 나는 몰랐지만 임상심리사는 고학력 ‘워킹 푸어working poor’가 되는 지름길이었다.
아아, 학부 4년에 대학원 5년까지 박사만 보고 공부에 극단적인 투자를 해서 천문학적인 학자금 융자를 받았는데, 그 결과가 시급 1400엔짜리 일자리인가. 대체 이게 뭐냐, 학부 1학년 때 했던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가 훨씬 벌이가 좋다니.
드물게 가족이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는 일자리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은 첫 번째 기본 방침 ‘상담이 주 업무일 것’에 걸렸다. 급여가 그럭저럭 많은 구인 공고의 업무 내용을 살펴보면, 정신과 병원에서 집단 프로그램이나 심리 검사를 진행하는 등 상담이 아닌 일이 주 업무였다. 병원 외에 사회복지와 교육 기관의 구인 공고도 있었지만, 역시 상담이 주된 업무는 아니었다.
첫 번째 방침은 내게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었다. 나는 그 무엇보다 상담을 하고 싶었다. 심리 검사도 아니고, 집단 프로그램도 아니고, 밀실에서 일대일로 이뤄지는 상담을 하고 싶었다.
더 엄밀히 말하면, 나는 치료therapy를 하고 싶었다.
돌봄과 치료
‘심리상담’이라는 말은 꽤나 친숙할 것이다. 상냥한 상담사가 친절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며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 이런 인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친절하게 들어주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 없잖아.’ 하고 상담에 반감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공부한 것은 그런 일반적인 인상과 다르다. 상담에도 몇 가지 갈래가 있는데, 내가 공부한 대학원은 ‘역동적 심리요법’이라는 학파의 본거지였다. 나는 그곳에서 ‘정신치료’ 또는 ‘심리요법’이라 불리는 더욱 전문적인 심리적 지원을 훈련했다.
프로이트나 융의 이름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니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시작된 ‘심층심리학’이라는 학문을 배웠다. 최대한 간단히 설명하면, 심층심리학은 사람의 마음속에 무의식이 있는데 그 무의식이라는 내가 아닌 나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기 때문에 때로 고통스러워진다고 주장한다.
그 말대로 마음속 깊은 곳에는 도저히 제어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 그런 자기 내면의 깊은 곳과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하는 것이 치료다. 그곳에 상처가 있다면, 그 상처를 만져본다. 그곳에 외면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그 욕망을 똑바로 바라본다. 상냥한 상담사가 그저 친절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달리 자기 자신의 괴로운 부분에 몰두한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점점 변하는 것이 정신치료의 목표다.
나는 대학원에서 훈련을 받으며 정신치료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두 사람이 밀실에서 거듭거듭 대화하다 보면 겉으로 나오지 않은 이면의 무언가가 드러난다. 수수께끼 같은 증상, 꿈, 과거의 역사 등을 이야기하다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의 이면을 꿰뚫는 한 줄기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대학원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모두 현장에서 마음속 깊은 곳을 진찰하는 듯한 정신치료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사실 심리사의 일 전체에서 치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아니, 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작다. 상담사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은 이 점에 가장 놀라는데, 임상심리사의 일은 대부분 치료가 아니라 돌봄(care)이다.
돌봄. 그것은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지원을 가리킨다. 치료가 비일상적인 시공간을 마련하여 마음속 깊은 곳에 몰두한다면, 돌봄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어려움에 대처한다.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고르게 정돈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나도 돌봄과 관련한 일을 한 적이 있다. 초중등학교에서 ‘마음 상담원’으로 일했는데, 직책에 ‘상담’이 들어가 있어서 아이들과 상담을 할 것 같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때 내가 한 일은 교실에서 지낼 수 없는 아이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도 다양한 마음의 교류가 일어난다. 같이 게임을 하거나 숙제를 하다 보면 아이들은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회복했다. 교실로 돌아가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그 과정을 함께했다.
그 나름대로 보람은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결국 일상을 함께 보내는 수준의 일이었고, 마음속 깊은 곳을 진찰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고 느꼈다. 뭐라고 할까, 그냥 아이를 보는 것 같을 때도 있어서 내가 전문적인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실제로 그런 일은 시급이 1000엔에 불과했고, 종사자들도 대부분 전문적인 훈련을 막 시작한 젊은이들이었다. 아예 비전문가예컨대 동네 아저씨나 아주머니도 있었다. 비전문가들도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전문가를 목표하던 내게는 통 성에 차지 않는 일이었다.
더 전문적인 일을 하고 싶다. 돌봄이 아니라 치료를 하고 싶다. 나는 마음 상담원 일을 하면서 그런 욕망을 품게 되었다.
돌봄보다 치료가 우월하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대학원에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소개받는 일의 종류가 여럿이 함께하는 돌봄에서 일대일의 정신치료로 점점 변했다. 그러면 더 수준 높은 일을 맡은 것 같아서 내가 성장했다고 뿌듯해했다.
세상에는 돌봄을 하는 일자리가 많지만, 그래도 나는 치료를 하고 싶었다. 일상이 아니라 비일상을 다루며, 마음속 깊은 곳을 살필 수 있는 치료자가 되고 싶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보다는 임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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