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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상상으로
미래를 만드는 뇌
1장
기억에서 상상으로
우리 뇌에서 추상적 개념을 사용한 자유로운 상상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의외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뇌 과학적 탐구는 ‘기억’이라는 주제에서 출발한다.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과 미래에 있을 법한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억을 담당하는 뇌 부위와 상상을 담당하는 뇌 부위는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뇌 과학자들조차도 최근까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7년, 이러한 통념을 뒤집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 부위와 상상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상당 부분 중복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 중심에 있는 핵심 부위가 바로 ‘해마’다. 해마는 측두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모양이 바닷속 생물인 해마를 닮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장에서는 해마가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1950년대의 발견부터 상상에 관여한다는 2000년대의 연구 결과에 이르기까지 해마 연구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기억과 상상이 뇌 속에서 어떻게 엮여 있는지 탐구해보자.
영원히 기억될 기억 상실자
2008년 12월 2일, 미국 동부 코네티컷주에 있는 요양원에서 한 남자가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은 세계 주요 언론을 통해 널리 보도됐다. 그는 단지 젊은 시절에 뇌 수술을 받은 후 뇌 과학자들의 연구에 성실히 협조한 환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한 사람으로 인해 뇌 과학의 역사가 완전히 바뀌었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부고에 “뇌 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환자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추론, 판단, 주의, 언어 등 인간의 다양한 고위 뇌 기능 중 학습과 기억에 대한 뇌 과학적 이해는 특히 앞서 있는데, 이 지식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로 그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뇌 수술로 기억을 잃었지만, 그로 인해 뇌 과학사에 영원히 기억될 흔적을 남기며 생을 마쳤다.
이 남자의 이름은 헨리 구스타프 몰레이슨Henry Gustav Molaison으로, 생전에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머리글자를 따서 ‘H.M.’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헨리 몰레이슨은 9세 때 자전거 사고로 머리를 부딪친 후 심한 간질 발작을 겪기 시작했다. 수술을 받기 전 그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 하루에 한 번 이상 심한 의식을 잃을 정도로 발작이 잦았다. 그는 27세에 해마를 포함한 내측 측두엽을 절제하는 뇌 수술을 받았는데, 이때부터 그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맞았다. 수술 후 간질 증세는 크게 완화됐지만, 새로운 경험을 기억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는 과거는 떠올릴 수 있었지만 현재를 축적하지 못하는 ‘기억의 캡슐’ 속에 갇힌 채 살아가야 했다. 놀랍게도 뇌의 다른 기능들은 거의 정상적으로 유지됐다. 감각, 운동, 언어, 지능, 단기 기억 대부분의 기능은 정상이었으며, 오래된 과거 기억도 비교적 잘 보전됐다. 새로운 경험을 장기적으로 저장하는 능력만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헨리 몰레이슨의 사례는 과학자들에게 뇌에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가 따로 있음을 알려줬다. 헨리 몰레이슨 이전에는 많은 과학자가 뇌 전체가 기억에 관여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심리학자 칼 래슐리Karl Lashley는 쥐의 대뇌피질cerebral cortex을 다양한 조합으로 손상시키는 실험을 통해 기억의 위치를 추적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손상된 위치와 학습 행동 간에 뚜렷한 상관관계를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뇌피질의 손상 부위에 따라 학습 능력이 저하된다는 결과를 바탕으로 기억이 대뇌피질 전체에 분산 저장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헨리 몰레이슨의 사례는 기억과 기타 뇌 기능이 분리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특정 뇌 부위가 기억 형성에 필수적이라는 증거를 제공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헨리 몰레이슨이 어린 시절의 기억 잘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억지럽 뇌 수술 이전의 기억은 비교적 정상적으로 유지됐다는 사실이다. 이는 새로운 기억 형성에 관여하는 뇌 부위와 오래된 기억을 최종적으로 저장하는 뇌 부위가 서로 다를 가능성을 시사한다. 헨리 몰레이슨은 해마를 포함한 내측 측두엽그림 2을 절제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이 부위가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해마가 새로운 정보를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억 임시 저장소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발견은 헨리 몰레이슨이 단계별 역행성 기억상실graded retrograde amnesia 증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역행성 기억상실이란 부상이나 질병 이전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잃는 것을 의미하며, 순행성 기억상실anterograde amnesia은 그 이후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헨리 몰레이슨은 뇌 수술 이전의 경험이 수술 시점에 가까울수록, 즉 더 최근일수록 회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수술 시점부터 대략 3년 전까지의 기억을 잃었으나,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과 같은 먼 과거의 일은 정상적인 수준으로 기억했다.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에 따르면 기억은 초기에 해마에 저장됐다가 시간이 흐르면 점차 재구성돼 신피질에 장기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단계별 역행성 기억상실과 기억의 응고화 현상은 인간의 기억이 컴퓨터 메모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저장됨을 시사한다. 왜 인간의 기억은 이러한 방식으로 저장될까? 왜 컴퓨터처럼 모든 기억을 최종 저장소에 저장하지 않을까? 과학자들은 이에 대해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그중 하나가 ‘임시 저장소’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해마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겪었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일화 기억episodic 을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역할을 맡고, 대뇌 신피질neocortex은 여러 경험에서 공통된 정보를 추출해 영구적인 의미 기억semantic memory으로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경험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한다면 뇌는 불필요한 정보도 평생 저장하게 돼 용량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험이 나중에 유용할지 판단해 바로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기란 쉽지 않다. 장기적으로 기억할 것과 버릴 것을 순간에 구분해내는 일은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 임시 저장소가 있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임시 저장소에 경험한 사실들을 보관하면 자주 사용되거나 특히 중요한 정보만 선별해 장기 기억으로 전송하는 일이 가능하다. 일상적인 상황에 대입해보면 이해가 편하다. 매일 아침 차를 몰고 출근한다고 가정할 때, 그날 주차한 위치를 퇴근할 때까지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매일 어디에 주차했는지를 평생 기억할 필요는 없다. 장기 기억에 저장되는 정보는 ‘어떤 회사를 다녔고, 자가용으로 출퇴근했다’는 일반적인 사실 정도면 충분하다.
기억의 응고화 과정에 대한 다른 설명도 존재하지만, 모든 과학자가 동의하는 하나의 정설은 아직 없다. 다중 흔적 이론multiple trace theory에 따르면, 과거의 구체적인 사건에 관한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해마에 남아 있으며, 응고화가 완료된 이후에도 구체적인 기억을 회상하려면 해마가 필요하다. 이러한 다양한 이론은 기억의 응고화 과정이 상상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7자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헨리 몰레이슨의 사례가 알려준 다른 중요한 사실은 기억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점이다. 몰레이슨은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기억할 수 없었지만, 반복 연습을 통해 새로운 행동 과제 수행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는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배우는 것서술 기억 또는 명시적 기억은 해마를 비롯한 내측 측두엽이 담당하는 반면, 자전거 타기와 같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절차 기억 또는 암묵적 기억은 다른 뇌 구조가 담당함을 의미한다. 기억의 다양한 형태와 관련된 연구는 매우 흥미롭지만 이 책의 주요 논점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더 깊은 논의는 생략하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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