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삶의 의미를
끝까지 지키기 위하여
나는 은퇴한 신경과 의사이며 현재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 초기 단계다. 신경과 의사로 일하는 동안 알츠하이머병과 다른 유형의 치매에 걸린 환자를 많이 진료했지만, 언젠가 나도 치매에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게도 치매가 찾아왔다. 이렇게 지금 나는 뇌를 천천히 잠식해가는 초기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환자이자 안팎이 뒤집힌 전문가의 입장에서 이 병을 바라보고 있다.
강조할 부분은 “천천히 잠식해가는”이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대부분 행동이나 인지 기능에서 증상이 나타날 때 이 병을 진단받는다.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도 본인이 느끼기에도 뭔가가 확연하게 ‘이상할’ 때 말이다. 대체로 뇌세포에 중증의 심각한 손상이 생긴 뒤다. 나는 그보다 훨씬 일찍 병을 발견했다. 일찌감치 이 병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순전히 운 좋게 나이 어떤 우전 정보를 알게 됐고 이를 계기로 임상 검사에 돌입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으니 내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병을 발견한 건 정말이지 큰 행운이었다. 그 덕에 임상시험과 혁신적인 치료법들을 경험하며 최첨단 의료 혜택을 누렸기 때문이다. 병을 시기적절하게 발견함으로써 상황이 흘러갈 경로가 크게 바뀐 셈이다. 또한 나는 알츠하이머병 환자뿐 아니라 전반적인 뇌 건강과 신경 회복탄력성 neural resilience에도 유익하다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식단과 운동, 사회적 활동 및 지적 활동을 선택하며 생활습관도 바꿨다. 그 과정에서 자연 자체가 이 여정의 공명정대한 안내자라는 걸 알게 됐다. 가장 정교한 기술로 바라본 세포 속 자연이든 산책길에 디딘 땅이든 강에서 마주한 물살의 흐름이든, 어디에서나 가르침이 솟아났다. 이렇게 과학자이자 의사로서 내가 얻은 구명줄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알츠하이머병 ‘초기’ 단계에서는 병이 거의 티가 나지 않거나 아주 가벼운 인지 손상만 나타난다. 그러다 보니 초기 단계만 연구하는 일부 신경과학자와 연구자 외에 이 경험담에서 도움을 얻을 사람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알츠하이머병 진단은 상황을 명료히 해준다. 원치 않은 일이긴 하겠지만 알츠하이머병 진단은 자신의 필멸성을 직시하고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겠다고 진지하게 마음먹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질병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일찍 알수록 그 과정을 멈추거나 속도를 늦출 합리적 조치를 더 빨리 취할 수 있고 삶의 다른 우선순위를 더 빨리 재검토할 수 있다. 남은 시간에 해야 할 정말 중요한 일은 어쩌면 버킷리스트를 점검하고 친구, 가족, 친지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과학과 통계가 보여주듯이 사회적 수준에서는 알츠하이머병을 둘러싸고 이미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고 게대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 발병률 증가, 의료·돌봄 전문가 부족, 제대로 준비되지도 않았고 효과적 돌봄을 제공할 만한 훈련도 충분히 받지 못한 1차 진료 의사들이 짊어지는 막대한 부담, 가족과 환자 본인의 상상할 수 없는 고통까지. 이들은 결코 소수가 아니다. 오늘날 미국에는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580만 명 정도인데, 2050년에는 이 수가 1,4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알츠하이머병 및 기타 치매의 전 세계 유병률은 2010년에 3,500만 명으로 추산됐고, 2050년에는 1억 1,500만 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고소득 구가의 치매 환자 대부분은 병이 중등도나 꽤 후기 단계에 이르러서 진단을 받는데, 이때가 되어서야 의학적으로 주의를 기울일 만한 증상이 처음으로 눈에 띄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급돠 사정이 더 안 좋은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이 치매에 대한 치료를 전혀 받지 못하거나 치매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야 병원에 가게 된다.
치매는 정상적인 노화 과정보다 훨씬 심하게 기억을 앗아가고 사고 과정에 혼란을 초래하는 뇌의 퇴행성 장애다. 뇌에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는 일상적 과제와 활동을 수행하는 능력,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반응하는 의사소통 능력, 인간관계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유지하는 능력을 손상시킨다. 전체 치매 가운데 적어도 60퍼센트는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것이며, 파킨슨병Parkinson’s disease을 비롯한 다른 치매 원인병도 증상만으로는 알츠하이머병과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다. 또한 한 사람에게 알츠하이머병과 다른 원인병이 모두 생기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지려면 뇌에 아밀로이드 플라크amyloid plaque,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amyloid beta protein 파편들의 덩어리와 엉킨 신경섬유 뭉치neurofibrillary tangle, 타우 단백질tau protein에 생긴 뒤틀린 미세섬유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 플라크와 뭉치는 1906년에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 박사가 발견한 것으로,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를 확인할 방법은 환자가 사망한 뒤에 뇌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뿐이었다. 오늘날에는 생체표지자biomarker,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측정하고 질병의 존재 여부나 건강 상태를 판단하는 데 쓰이는 생체 신호-옮긴이 검사를 통해 살아 있는 동안에도 알츠하이머병의 존재에 관해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뇌척수액 검사spinal fluid test도 이에 포함되는데, 플라크를 이루는 아밀로이드 단백질과 신경섬유 뭉치에서 발견되는 비정상적 타우 단백질의 존재를 조사한다. 양전자방출단층촬영positron emission tomography, PET을 통해 아밀로이드와 타우 단백질의 위치를 파악할 수도 있고, 머지않아 혈액 검사를 통해서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2024년을 기준으로 혈액 검사는 미국, 한국, 유럽 등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점점 확대되는 추세-옮긴이.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에서 제일 먼저 생기는 이상인 플라크 형성이, 치매의 인지 증상이 나타나는 시점보다 길게는 20년 전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생체표지자를 활용한 연구에서 밝혀졌다. 뇌세포에 타우 단백질 뭉치가 생기고 그 결과 뇌세포가 사멸하며 뇌가 위축되는 현상은 인지 손상이 처음 나타나는 무렵에 시작되기도 하고, 그보다 몇 년 앞서 시작되기도 한다.
이처럼 알츠하이머의 외적인 증상이 나타나는 시점보다 수년 전에 뇌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병의 진행을 바꿀 수 있는 효과적인 치료는 병의 초기 단계에, 증상이 나타나기보다 훨씬 전에 시작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통상적으로 알츠하이머병은 줄곧 알츠하이머 치매와 동의어였고 알츠하이머병의 진단 역시 치매 증상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됐다. 일부 전문가는 여전히 이 엄격한 정의를 고수한다. 하지만 인지 손상이 나타나기 10~20년 전에 뇌의 병리적 변화가 시작된다는 사실이 확실히 밝혀진 20년 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인지 기능은 아직 정상이지만 이미 뇌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증상 발현 이전 시기도 알츠하이머병 정의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많아졌다. 그래야 병의 진행을 늦추기 위한 개입을 더 빨리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진단의 관점에서 초기 알츠하이머병을 어떻게 정의할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와 별개로 질병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검사법들이 있다. 이런 검사들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 알츠하이머병의 인지 저하 속도를 늦춰준다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방법들을 적용할 소중한 시간을 벌어준다. 과거에 내가 알츠하이머병 환자들과 처음으로 만나는 때는 이미 그들의 인지 손상이 한참 진행된 시점이었다. 그 시절에도 그런 검사법들이 존재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무나 아쉽다.
나는 일선 의사로서는 은퇴했지만, 이는 내게 초기 알츠하이머병과 그에 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관한 인식을 높이는 데 쏟을 시간이 더 많아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