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방식
법은 책임지지 않는다
법이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순간
법을 공부하고 알리는 사람으로서 내 삶은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셈이다. 학사 학위를 마치고 주변의 세상이 새롭게 열리고 있었다. 피노체트는 국민투표로 인해 독재를 연장하는 데 실패했고, 남미의 남부 지역은 군부 독재를 청산하고 있었다. 북반구에서 고르바초프는 비슷한 시기에 소련의 정치·경제·사회의 제반 문제에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를 선언했다. 박사 과정을 시작한 젊은 여성인 나는 이 모든 민주주의의 실험이 약속하는 가능성에 매료되고 말았다.
당시 뉴욕에서의 생활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와 같은 학생들은 브로드웨이와 10번가 사이에 있는, 복잡한 대도시 가운데에 자리 잡은 컬럼비아대학에서 생활했다. 나는 첫날부터 매혹됐다. 124번가에 있는 국제학 건물의 복도는 긴급해 보이는 대자보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소리를 질러 강의가 취소됐다고 알리면서 새로운 과목을 개설하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1990년대의 매일 같이 요동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소련법’ 강의는 폐강되어 ‘소련 지역에서의 법률 제정’으로 대체됐고, 강의명에 ‘공산주의’가 있으면 ‘포스트 공산주의’나 다른 비슷한 용어로 바뀌었다. ‘계획 경제’는 ‘전환기의 경제’로 바뀌는 등 여러 변화가 있었다. 전 지구의 광범한 지역의 국가들이 새로운 규칙과 법을 제정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탈바꿈하면서, 낡은 규칙과 권위의 구조가 무너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살아 있는 실험실이었다. 우리가 자라면서 배웠듯이 핵전쟁에 의해 비극적으로 종식될 거라 믿었던 냉전 체제는, 마치 포템킨 마을정치학과 경제학에서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 실상을 감추려는 허상이나 눈속임을 뜻하는 표현-옮긴이처럼 법률이 하나씩 해체되고 있었다. 더 나은 법률, 민주적인 법률, 권리와 자유로 가득한 헌법을 만들고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박사 과정 1년 차에 나는 훗날 이 과정의 일부가 될 논문을 지도교수와 함께 썼다. 지도교수와의 작업을 계기로, 나는 규칙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적절한 규칙을 만드는 것, 올바르게 선택된 규칙을 통해 사람들에게 적절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선한 민주주의와 시민을 양성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 것이다. 맛있는 에티오피아 음식과 친구들이 보내준 벤앤제리스 아이스크림으로 당을 충전하며 밤늦게까지 작업한 결과, 놀라운 상관관계의 근거를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미성숙한 민주주의의 안정화, 학계 용어로 민주주의의 공고화에는 헌법상 대통령제보다 의원내각제가 더 적합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사람들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의 통치가 불만족스럽거나, 시민들이 요구하는 정책을 펼치지 못하거나, 의회의 다수당과 갈등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선거 이외의 방법으로 지도자를 끌어내릴 방법은 두 가지뿐이며 둘 다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일단 탄핵이라는 지난한 법적 절차가 있다. 미국인이라면 알다시피, 가능성이 희박하면서도 국론을 분열시키는 방법이다. 다음으로 더 효율적이지만 피비린내 나는 해결책인 쿠데타가 있다. 쿠데타는 군부가 정치 행위자가 된 아프리카와 남미 등지의 대통령제미국 대통령제 헌법에서 영감을 얻은하에서 만연했다.
물론 의원내각제도 실패 사례는 많지만, 대통령제만큼 빈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그린 그래프에서 점에 불과한 정치 체제와 지역의 내면을 들여다볼수록, 규칙만 바꾼다고 답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가 아마 리우데자네이루와 브라질리아에서 전직 군 지도자들을 만나며 여름을 보낸 시기였던 것 같다. 거기서 나는 식민 권력에서 독립을 이끌어낸 카우질류caudilho, 당수나 우두머리를 뜻하는 포르투갈어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정치 군사 지도자를 뜻한다―옮긴이와 같은 강한 리더십에 매료되었던 역사로 점철된 나라에서, 내각제가 효과가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나라였고 그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이 나라의 지니계수는 50퍼센트를 맴돌았다. 지니계수는 소득 불평등의 표준 척도로, 0퍼센트는 완벽한 평등을 의미한다. 즉, 매우 불평등한 나라라는 뜻이었다. 심각한 소득 양극화뿐 아니라 도시와 농촌 간의 극심한 격차로 어려움을 겪는 브라질의 복잡한 사회적·경제적·지리적 환경은 광범위한 부패, 정치적 무관심과 행동주의 사이에서 극단적인 변동을 촉진하는 분열을 초래했다. 그리고 카리스마적이지만 동시에 문제가 있는 지도자가 부상했다.
아니면 하이델베르크에서 1년 반을 보내던 때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나는 가장 진보적인 헌법을 채택한 나라 중 하나였던 바이마르공화국이 붕괴한 원인을 연구했다. 나는 괴테가 그토록 좋아했던 은행나무 아래서 바이마르 헌법을 공부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멸망이, 그 유명한 제48조대통령이 위기 상황에서 군사력을 동원해 ‘필요한 조치’라며 모호하게 정의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한 긴급명령권를 포함한 치명적 규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내 독일인 친구들과 동료들은 자국의 역사적 증언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느끼는 듯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문제는 세계사적인 중대한 전환점에서 경제 위기를 앞두고 복잡한 사회 구조를 지닌 데 있었으며,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혹은 혹독한 겨울 날씨였던 2월에 모스크바로 가서 인권운동가들과 정부 장관들을 만나 인터뷰하던 때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만난 사람 중 하나가 옐친 대통령의 민족 문제 자문위원을 지낸 갈리나 스타로보이토바Galina Starovoytova였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모스크바의 의회인 두마 건너편에 있는 피자헛에서 나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그로부터 겨우 몇 달 후에 암살당했다. 그때 러시아의 새로운 지도자 중 상당수가 ‘팀 플레이어’가 아닌 탓에 함께 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해줬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의 인성과 태도는 규칙과 그에 따른 보상 체계와는 또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맴돌기 시작했다.
현실 세계의 경험이 누적되면서, 범의 힘에 대한 의구심은 커져만 갔다.
비교정치학과 법학 교수로서 그리고 외국 정부의 엘리트를 교육하고 그들에게 자문을 제공하는 실무자로서, 그동안 부인해왔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말이다. 법률을 올바르게 제정하려는 그 많은 노력에도 말이다. 우리가 대학과 싱크탱크에서 수십 년간 기록하고 설명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처음에는 1980년대에 들어서며 수년간의 잔혹한 폭정 끝에 남미 독재 정권이 종식되는 것을 보면서 희망에 찼다. 그러나 10년도 안 되어 남미 남부의 민주주의 전환은 중단되었고, 아르헨티나 학자인 기예르모 오도넬Guillermo O’Donnell이 말한 ‘위임민주주의’로 귀결되었다. 부분적 민주주의와 다름없는 위임민주주의에서 대통령들은 자유투표로 선출됐지만, 책임감을 가진 지도자라기보다는 카우질류처럼 행동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