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북핵 문제의 역사적 뿌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영도한다는 조선로동당의 지휘부가 언제, 어떤 이유로 핵에너지의 무기화, 곧 핵무기 개발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는지는 지금껏 정확히 알려진 사실이 없다. 북핵 문제의 기원, 조선 수뇌부의 핵무기 개발 이유, 북핵 대처법 따위를 두고 한국과 미국을 포함한 각국 정부와 전문가들의 판단과 처방이 엇갈리는 까닭이다.
조선의 핵무기 개발 배경을 두곤 세 갈래 판단이 서로 엇갈리거나 중첩된다. 첫째, 대미 억지력이다. 둘째, 외교 협상력 강화 수단이다. 셋째, 정권 안보용이다. 셋 가운데 무엇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각국 정부와 전문가들의 판단과 처방이 달라진다.
조선을 독재자가 이끄는 실패국가 또는 불량국가로 간주하는 이들은 첫째와 셋째를 중시한다. 예컨대 “북한 정권은 오로지 세습 전체주의의 정권 유지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다”는 윤석열, “김정은 같은 폭군이나 독재자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카멀라 해리스를 포함한 미국 정부와 의회 고위층의 인식이 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반면 한국전쟁을 치른 미국과 조선의 오랜 적대관계에 주목하는 이들은 첫째와 둘째를 상대적으로 중시한다. “북핵 문제는 미―북 적대 관계의 산물”이라며 “북한은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하며 안전을 보장받고 정치·경제적 관계를 개선하는 데 핵 문제를 지렛대로 사용하고자 한 것”이라는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과 윌리엄 페리 전 미국 대북정책조정관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조선의 핵무기 개발 시작 시기를 판단하는 데에도 대북 인식이 영향을 끼친다. 조선을 불량국가로 여기는 이들은 1950년대까지 그 시기를 끌어올리는 경향이 강하고, 조선의 핵무기 개발을 ‘억지력+협상용’ 지렛대로 여기는 경향이 강한 이들은 조선의 고립 심화와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화가 겹쳐진 탈냉전 초기, 북핵 문제가 처음으로 국제정치 현안으로 떠오른 사실에 주목한다. 이렇듯 사람들 머릿속에서 ‘사실’과 ‘인식’은 서로한테 영향을 주며 서로를 비튼다. 문제 진단과 해법 모색 과정에서 공론의 마련이 어려운 까닭이다.
한국전쟁기 미국의 핵공격 위협
조선이 언제 핵에너지의 무기화를 결정했느냐는 핵심 논점과 별개로, 조선이 핵무기 위협에 노출된 시점, 핵에너지 이용을 고민하기 시작한 시점은 195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전후의 조―미―중 관계, 조―소 관계에 그 뿌리가 있다.
한국전쟁 때 미국 수뇌부는 핵무기 사용 계획을 세웠고, 실제 사용을 두고 대통령과 최고사령관이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진지하게 핵무기사용을 고려한 첫 시점은 1950년 겨울이다. 1950년 10월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에 나서자,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참전했다. 전황이 급작스레 나빠지자 미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을 추진했다. 맥아더는 만주의 중국인민지원군 집결지에 네 기의 핵폭탄 투하를 포함해 조―중 접경인 압록강을 따라 모두 스물여섯 기의 핵무기를 투하해 방사능 벨트를 만들겠다는 재앙적 계획을 세우고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요청했다. 한국전쟁을 핵전쟁으로 확대해 중화인민공화국까지 쓰러뜨리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걱정한 트루먼은 맥아더의 요구를 거부했고, 맥아더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한민족은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핵전쟁의 문 앞에서 살아남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임동원에 따르면, 이듬해인 1951년 봄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소련 공군사단의 만주 배치와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규모 집결 관련 첩보를 입수한 뒤, 핵무기 사용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웠다. 만주의 표적에 핵폭탄을 투하하고, 중국의 대규모 증원군이 투입되면 38선 언저리에 방사능 벨트를 형성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고, 그 실행을 위해 공군 제9폭격비행단이 괌에 배치됐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소련과 중국이 모두 확전을 원치 않음이 확인되고 1951년 7월 정전 협상이 시작돼 이 계획은 백지화됐다. 주한미군 근무 경험이 있는 미국의 군사전략 사상가인 에이드리언 루이스는 “한국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며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한국전 당시 중국의 개입으로, 미군은 역사상 최대의 후퇴를 했다. 그래서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핵무기를 사용하라는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트루먼은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인위적 제한전이 생겨난 순간이다. 지고 있고, 후퇴하고 있는 전쟁에서도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건 어려운 결정이다. 현대전의 중요한 기점이 한국전쟁이다. 인위적 제한전의 시초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중―소의 전략적 선택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언제든 핵전쟁으로 번질 위험이 있지만 정작 실행은 어렵다는 인식의 역사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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