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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가의 목표는 천하무적
합기도는 무도이기에 수련의 방편으로 ‘적이 나를 공격해온다’는 설정을 한다. 이는 사실 ‘적’이라는 개념을 무효화하기 위한 설정이다. 수련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텐데, 지금부터 풀어가 보겠다.
무도 수련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우선 ‘적이란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적’이라는 말을 남용하면서도 그 의미를 잘 모른다. 무도의 궁극 목표는 천하무적이다. ‘무적’은 무슨 뜻일까? 과연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천하무적’이란 만나는 사람을 차례차례 쓰러뜨려 경쟁 상대를 모두 죽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설마.
아니, 그러고 보니 그런 망언을 일삼는 남자가 있었다. 영화 『황야의 7인』에서 로버트 본이 연기한 고고한 총잡이 ‘리’다. 총잡이들이 모여 자기들이 못 가진 것을 꼽는 장면이 있다. “아내도 없어, 자식도 없어, 친구도 없어, 돌아갈 집도 없어…….” 이것저것 꼽고 있을 때 리가 불쑥 “적도 없어”라며 끼어든다. 크리스와 빈크리스와 빈은 각각 율 브리너와 스티브 맥퀸이 연기했다.이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리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덧붙인다. “살아 있는 적”도 없다고. 굳이 안 해도 될 말이었던 것이…… 아니나 다를까, 총격전이 벌어지자 리는 곧바로 총에 맞아 죽고 만다.
‘천하무적’이란 ‘자신을 해치려는 자는 모두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일은 아무리 월등한 신체능력의 소유자라도 불가능하다. 어떤 인간이라도 언젠가는 병들어 죽는다. 지금껏 사신死神을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무도를 수련하는 이상 목표는 ‘천하무적’이어야 한다. 실현 가능성이 있든 없든, 수련에는 반드시 무한 소실점을 향하는 목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니, 저는 그런 큰 목표는 없고요, 그보다 수준은 좀 낮더라도 그럭저럭 쓸 만한 기술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말하는 겸손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그러니까 굳이 일류 스승에게 배울 생각도 없고, 수준 높은 수련도 원하지 않아요”라고 한다면, 그건 무의미한 것을 넘어 꽤 오만한 발언이다. “제 목표는 그럭저럭 하는 정도이지 최고의 경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게 어울리는 수준의 선생님을 찾아 낮은 단계의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며 자신의 스승을 ‘고만고만한’ 존재로 간주한 셈이니 말이다. 아직 숙달되지도 않은, 그저 배우는 중인 기예를 놓고 스스로 일류와 삼류를 구별할 줄 안다고 여긴다. 아직 미숙한 몸이면서도 한눈에 내려다보는 시각을 부당하게 선점하고 ‘저 선생님은 대단하지만 이 선생님은 그저 그렇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그런 사람은 이미 그 시점에서 기예를 더 배울 자격이 없다.
어떤 기예든 일단 수련하기 시작하면 최고의 경지를 목표로 해야 한다. 경지는 여행의 목적지 같은 것이다. KTX를 타고원문은 신칸센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KTX를 예로 들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광명이나 오송쯤에서 시간이 다 되어 거기서 여정을 끝내고 숨이 끊어져도 수련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무렇지도 않다. 올바른 목적지를 목표로 삼아 숙연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영등포에서 끝나든 천안에서 끝나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다. 인생을 걸고 수련했다고 가슴을 펴고 얘기할 수 있으면 된다. 다만 무도의 목적지는 ‘천하무적’이다. 이 사실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전에 중등교육에서 무도가 필수교과로 정해졌을 때 나는 무도가로서 강하게 반대했다. 필수교과 지정의 목적이 ‘애국심 함양’이나 ‘예의 교육’처럼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실리적이었기 때문이다. 무도는 그런 구체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애국심을 함양하고 싶다면 ‘애국심’이라는 과목을 만들면 된다. 예의를 갖추길 원한다면 ‘예의’라는 과목을 만들면 된다. 무도를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일은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무도의 목적은 천하무적이다. 오로지 그것뿐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련은 모든 무도 수행자가 ‘지금, 여기’에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적을 쓰러뜨린다’는 것을 수련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사람을 효과적으로 살상하는 기술은 무도와는 완전히 별개의 기술 체계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훈련을 받은 것도, 월등한 신체능력을 지닌 것도 아닌데 살상 능력치가 선천적으로 높은 사람이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살상의 최고수가 있다면 그는 사람이나 짐승을 전혀 해하지 않음 직한 표정과 몸짓으로 그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예컨대 아무 감정도 없는 표정으로 다가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표적’의 급소를 공격하고도 심박수도 혈압도 그대로인 채 자리를 뜰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적을 쓰러뜨리는 달인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그런 기술을 터득할 필요가 없다. 그런 기술을 터득한다고 해서 인생이 풍요로워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식인귀 한니발 렉터 박사는 간호사의 볼살을 물어뜯는 동안에도 심박수가 변하지 않는다지만, 렉터 박사처럼 되려고 수련하겠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무도 수업은 만인에게 유용하고 만인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니 무도의 목적은 적을 쓰러뜨리기 위한 기술의 터득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닌 천하무적이란 무슨 의미일까?
‘천하무적’이란 ‘천하에 적이 없다’는 뜻이다. ‘적이 없다’는 것은 ‘있었지만 배제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애당초 없다’는 것이다. 세상을 둘러보았을 때 ‘적’이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온화하고 너른 경지에 이르는 것, 그것이 무도 수련의 목적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갑자기 그런 경지에 도달할 리는 없다. 천하무적은 어디까지나 무한소실점이다. 우리는 그곳을 목표로 수행하지만, 그곳에 이르지 못하고 목숨이 다해 생을 마감한다. 그렇지만 목표로 하는 방향이 맞는다면, 수행자로서 할 일은 했다고 말해도 좋다.
무적에 이르는 데는 전 단계가 있다. 바로 ‘적’이라는 개념을 갱신하는 것이다. ‘적’을 재정의하는 일이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적’ 개념을 고쳐 쓴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적 개념을 최대한 확대하는 것이다. ‘적’이라는 것은 눈앞에서 나를 살상하려 드는 인간만이 아니다. (보통 사람은 그런 일을 거의 겪지 않는다.) 시합이나 경쟁에서의 ‘라이벌’도 ‘적’에 포함된다. (스포츠에서 사용하는 ‘적’이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밖에 없다.) 더 넓은 의미에서는 자신의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인간도 적으로 간주할 수 있다. 강압적인 상사라든가, 무능하고 무책임한 동료라든가,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남편, 반항적인 아이, 불쾌한 이웃, 지하철의 치한…… 그런 인간 때문에 살고픈 마음이 시들고 우울해지고 밤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는다면 그들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적이다.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효과만 놓고 말한다면 배기가스도 적이고 꽃가루도 적이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적이다. 애당초 나이 드는 것이야말로 전 인류에게 최강의 ‘적’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시시각각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 먹는 과정이다.
실제로 세계적인 프로선수는 월드투어에 코치, 의사, 상담사, 푸드 컨설턴트, 홍보 담당자, 변호사 등을 데리고 다닌다. 기술적인 결점뿐만 아니라 질병도, 정신적 스트레스도, 체중 관리도, 언론의 평가도, 이혼 소송도, 모든 것이 경기장에서 마주하는 맞수와 마찬가지로때에 따라서는 그 이상으로 자신의 기량을 저하시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즉 운동선수를 놓고 보면, ‘적’이라는 카테고리에 포함되는 것이 늘면 늘수록 기량 저하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리스트업할 수 있는 ‘적’의 수와 종류가 많을수록 ‘지는’ 리스크는 줄어든다. 이 이치를 이해한다면, 수련의 여정도 (서울-부산 KTX를 타고) ‘대전’쯤까지 도달한 셈이다.
‘천하무적’으로 가는 길의 첫걸음은 “그러고 보면 세상은 거의 다 적투성이잖아”라며 어이없어 하는 것이다. 사실 맞는 말이다. 세상은 온통 적투성이다. 눈앞에 있는 문과 벽도 나의 동선을 막고 나의 가동역可動域을 한정하며 나의 자유를 해치는 ‘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그런 것은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문은 손잡이를 돌리면 열리고 벽은 돌아가면 되니 말이다. 배우자나 자녀도 종종 나의 자아실현을 방해하고 나에게 과도한 노동을 부과하며 나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배려를 요구한다. 나의 자유를 해치고 있다는 점에서 가족은 나의 ‘적’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들과 적절한 관계를 제대로 유지한다면, 그들은 나의 자기실현을 지원해 주고 나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 주고 나에게 신경 써 주기도 한다.
즉 대부분의 ‘적’은 ‘쓰러뜨리지’ 않고도 그 ‘적성’敵性을 해제할 수 있다.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폭음과 폭식을 삼가며, 가족이나 친구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숨겨야 하는 추문은 애초에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 쓰고, 나이 들어 신체능력이 떨어지면 “뭐, 인간이라는 게 그런 거지”라며 쿨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라고 말하며 웃는 얼굴로 죽음의 여행을 떠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적의 적성은 상당 부분까지 해소된다. 나의 가동역을 제약하고 나의 자유를 해치고 나의 동선을 막는 것을 모조리 ‘적’으로 재정의한다면, 거기에는 경기장에서 마주하는 경쟁자뿐 아니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부양가족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것들의 대부분은 내가 경계하고 주의하면 ‘적성을 해제’할 수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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