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격변의 시대
요즘 TV를 보면, 심리학자나 상담가가 유달리 많이 나옵니다.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TV에 나오는 게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그 빈도가 많이 잦아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심리학에 귀를 기울이고 정치·사회적으로도 점술가나 무속신앙 등에 의지하는 이런 현상은 보통 세상이 확 바뀌거나 과도기에 처했을 때 많이 일어나는데요, 사람들이 그만큼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국제정치학자의 입장에서 봐도 우리가 직면한 지금은 정말 엄청난 격변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불안해하고 힘들어할 만합니다. 2025년은 을사늑약 120주년이자 광복 80주년입니다. 이런 숫자까지 딱 맞아떨어지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지금 시기는 국제정치학자의 입장에서 봐도 우리가 직면한 지금은 정말 엄청난 격변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불안해하고 힘들어할 만합니다. 2025년은 을사늑약 120주년이자 광복 80주년입니다. 이런 숫자까지 딱 맞아떨어지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지금 시기는 국제정치의 역사와 흐름 속에서도 격변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격변을 상징하는 거대한 사건 중 하나가 트럼프D.Trump 미국 대통령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제가 오늘 드릴 이야기는 트럼프의 등장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충격적 일탈이자 괴물의 등장이라는 예외적인 사건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트럼프는 현재의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한 원인이자 결과이며, 때로는 변화를 가속하는 촉매이기도 합니다. 마치 2024년 말에 일어난 윤석열의 내란이 45년 만에 뜬금없이 발생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 내재된 문제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 책에서는 트럼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미국의 변화, 나아가 국제질서의 변화를 읽고 어떤 흐름 위에서 새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지,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시대는 과연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들여다보겠습니다. 그리고 과연 한국은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국제질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까지 두루 살펴보겠습니다.
탈냉전과 팍스 아메리카나
국제질서의 큰 흐름을 볼 수 있는 몇가지 굵직한 세계사적 사건들로 이야기를 시작해봅시다. 먼저 1991년 크리스마스,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이 끝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이어져온 이념과 진영의 대결체제가 거의 반세기 만에 한쪽 진영의 지배국가 붕괴로 종결된 것입니다. 냉전이 끝난 이후를 우리는 탈냉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탈냉전은 말 그대로 냉전이 끝났다는 얘기인데요, 이 탈냉전을 설명하는 여러 용어 중 하나가 자유주의 국제질서 또는 신자유주의체제입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학적 용어로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사상이죠. 국가권력의 시장 개입을 제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국제정치에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현상이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세계화’라고 불렀습니다. 즉, 세계화란 정치 시스템이나 경제 시스템, 혹은 국제기구를 통해서 전세계가 하나로 협력하고 통합하는 질서를 일컫습니다.
여러 국가가 하나로 모였을 때 물론 힘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각 국가는 주권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 위에 국가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국제정치는 기본적으로 혼란하고 때론 전쟁 같은 극단적인 수단이 동원되기도 합니다.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세계의 안정성을 위해 국제적으로도 정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물이 국제기구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기구들이 국내 정치의 정부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 한계도 매우 큽니다.
예를 들면 UN국제연합은 192개국의 회원국들로 구성되어 세계정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강제적인 힘을 가진 국내 정부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지요. 기구의 목적인 평화유지나 전쟁 방지에도 한계를 보입니다. 그래서 현실주의자들은 국제기구가 별 소용이 없다고 평가하고 그런 비판은 꽤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기구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낫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평화유지나 자유무역 질서를 유지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합니다. 강대국들로서도 모든 경우에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지나친 비용이 들고 소모적이거든요. 규칙을 만들어 국제협력을 통하면 정당성도 얻고, 큰 비용 투입 없이 이익도 얻게 됩니다. 약소국에도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국제기구가 강대국들의 이익에 활용되는 측면도 있지만 반대로 강대국의 야만성을 제어하기도 하고, 자기와 비슷한 힘을 가진 고만고만한 국가들을 국제기구가 견제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국제질서의 안정성 유지를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이 패권의 존재입니다. 국제정치학의 패권안정론은 패권의 힘 때문에 역설적으로 세계질서의 안정 또는 평화가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라틴어로 평화를 의미하는 팍스Pax와 패권국가의 이름을 조합해 명명하는데요. 아주 오래 전 존재했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있습니다. 로마가 강성했을 때, 적어도 로마의 영향권 내에서는 로마의 정복 전쟁 외에 다른 전쟁은 없었습니다. 혼란하지 않았다는 거죠. 이후 스페인 제국이 강성할 때를 팍스 히스파니카Pax Hispanica, 대영제국의 전성시대는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라고 불렀습니다. 이렇듯 미국의 강력한 힘에 의한 평화체제를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부터 시작됐다고도 합니다. 당시 미국의 절대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고려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소련의 존재로 인해 팍스 아메리카나는 미소 냉전의 양극체제와 혼용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소련은 전혀 미국의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대립이 있었다는 점에서 한 국가에 의한 평화체제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죠. 또 인류를 공멸로 몰아갈 수 있는 강력한 핵무기의 대립까지, 이른바 ‘공포의 균형’ 체제였습니다.
그렇게 1945년부터 냉전이 반세기 정도 유지되다가 1991년, 드디어 한 축이 무너지게 된 겁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원을 1945년으로 볼 수는 있겠지만 1991년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완성을 이루게 된 겁니다. 어느 수준으로 완성되었느냐면 미국의 패권적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국가가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바깥에 있었던 거의 유일한 국가가 있다면 북한 정도입니다.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진영에 있던 동유럽 국가들도 북한 빼고는 모두 자본주의로 체제 변화를 하게 됩니다.
소련 붕괴로 탈냉전이 시작된 1991년부터 대략 10년 동안은 그야말로 미국의 세상이었습니다. 어떤 도전자도 없었던, 일극체제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죠. 미국은 정치 국방 경제 문화 교육 등 전방위에서 여타 국가들을 압도했습니다. 미국의 GDP는 전세계 GDP의 4분의 1을 넘었고, 국방 예산은 2위~15위 국가들의 국방 예산을 모두 합한 것과 비슷한 규모였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걸프전 등에서 세계 연합군을 구성하는 등 국력을 과시하며 세계 경찰 역할을 도맡았습니다. 지구상 모든 대륙과 해양에 미국의 영향력과 통제력이 미치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문화적으로도 1950년대 락앤롤을 전파했듯이 힙합문화를 퍼트리기도 했으며, 디즈니와 맥도날드처럼 전세계 대중문화나 업무방식의 표준을 만들었습니다. IT 산업의 본격 도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빌 게이츠Bill Gates가 탄생시킨 마이크로소프트는 본격적인 인터넷 시대를 열면서 인류의 생활방식 자체를 바꾸어놓았으며, 곧 전세계가 미국의 방식을 따라가게 하는 표준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코믹스 세계관인 DC 유니버스에서 가장 강력한 히어로인 슈퍼맨을 아시지요? 2025년에 영화 『슈퍼맨 리부트』가 개봉할 정도로 오랜 시간 사랑받는 캐릭터인 슈퍼맨은 총알도 뚫지 못하는 피부, 초인적인 힘, 비행 능력, 레이저빔 등 거의 신神에 가까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냉전이 끝난 1991년부터 10년간의 미국은 거의 슈퍼맨급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당시에 미국 패권의 절대적인 능력을 슈퍼맨에 비유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어요.
두 번의 위기와 슈퍼맨의 약점
미국의 이런 완벽한 상태의 패권질서는 대략 10년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긍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모순도 함께 커졌습니다. 특히 사회주의와의 체제경쟁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자본주의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빈부격차 또는 불평등이 더욱 극단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슈퍼맨에게도 초능력을 무력화하고 심각한 신체적 약화를 부르는 크립토나이트라는 약점이 있는 것처럼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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