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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인연이 깊은 사이
지금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적대적 관계가 된 이스라엘과 이란은 구약과 신약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고대부터 인연이 깊다. 이란의 옛 이름은 페르시아지만, 훨씬 이전에는 엘람이었다. 엘람은 모세의 아들인 셈의 다섯 아들 중 맏아들의 이름이다.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창 10:22)
구약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엘람은 유대 민족과는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인연이 깊다. 그런데 엘람은 맏아들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 더는 성경에서 그의 후손들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다. 이는 곧 엘람이 다른 형제들과 떨어져 살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엘람과 그의 후손들은 아라랏산 남동부 지금의 이란 지역에 정착하였고 그 지역을 엘람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14장에 엘람 민족이 또다시 등장하는데 아브람 시대 때 엘람의 왕 그돌라오멜Kadorlaomer이 다른 민족 국가들과 연합하여 군사 동맹군을 결성해서 가나안 땅의 소돔과 고모라를 공격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은 그야말로 교통수단이라고는 전무하던 그 옛날에 엘람에서 1,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소돔과 고모라에 쳐들어가서 인류 최초의 국제 전쟁을 일으킬 만큼 힘과 호전성이 뛰어났다. 소돔과 고모라를 공격한 이유는 12년 동안 엘람에 충성하다가 배반했다는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엘람이 주도한 연합군이 크게 승리하여 소돔과 고모라의 식량과 재물을 모두 가져갈 정도로 엘람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 없었다.
이사야서 22장 6절에 “엘람 사람은 화살통을 메었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라고 할 정도로 활을 잘 다루는 민족으로 표현되었다. 에스겔서 32장 24절에는 “거기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라고 할 정도로 잔인하고 난폭한 족속으로 묘사되었다.
고대의 엘람은 풍부한 지하 광물과 튼튼한 나무들이 많았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잘 이용하여 오래전부터 상업이 발달하였고 정치적·군사적 공동체로 성장해 나가다가 메대족과 병합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이룬다.
BC 586년에 유다 왕국이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멸망한 후 바빌론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고 있을 때도 일부 유대인들은 엘람에서 살았기 때문에 엘람인과 유대인 사이에 큰 갈등은 없었다. 오히려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고 BC 539년에 바빌론을 정복한 고레스Cyrus는 대제국의 왕답게 바빌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포로로 잡혀 와 있던 유대인들도 역시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레스가 바빌론을 정복한 뒤 제일 먼저 한 일이 포로로 잡혀 와 있던 여러 민족을 모두 풀어주는 것이었다.
유대 민족도 포로로 끌려온 지 50년 만인 BC 538년에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대하 36:23)며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오늘날 적대 관계에 있는 이란의 선조 고레스가 한때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이자 해방자 역할을 했다. 당시 고레스는 바빌론에 살던 유대인 15만 명 가운데 1차로 만여 명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바빌론이 약탈한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을 가지고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사야는 페르시아에 고레스가 등장하기 150년 전에 이미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사 45:1), “내가 고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사 45:13)고 예언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스라엘 민족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바빌론에서 노예로 살다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페르시아는 여간 고마운 민족이 아닐 수 없다.
고레스의 친유대 정책은 그가 죽은 후 유대인 왕비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왕 당시에도 변하지 않았다. 하만의 음모로 페르시아 전역에 남아 있는 모든 유대인을 멸족시키려 할 때도 아하수에로왕은 하만과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유대인 모르드개를 2인자의 자리에 앉히기까지 했다. 이 일을 기념하는 것이 현재 유대인들이 지키는 부림절의 유래다.
그러다 보니 현재 이란에 다니엘, 아하수에로왕의 왕비였던 유대 여인 에스더, 모르드개의 무덤이 메대Mede왕국의 수도였던 하마단Hamedan에 있다.
페르시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 당시까지도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찾아왔던 동방박사 역시 페르시아에서 왔으며 이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할 때 모여 있었던 120명 중에는 엘람에서 온 유대인들도 있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다대오Thaddaeus의 무덤도 오늘날 이란 북부 지역인 마쿠Maku에서 남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다대오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아르메니아 남부 지역과 바로 옆에 있는 엘람 북부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에도 2천여 년 동안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에서 살았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차례 페르시아 제국의 변화가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공동체와 종교에 특별히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통치자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것이 유대인 공동체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통치자에게는 신뢰를 받지만, 동시에 기회주의자라는 소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페르시아 제국에 이슬람 제국이 들어섰을 때도 초기 이슬람은 다른 종교에 비교적 관대했기 때문에 오히려 유대인들은 의학,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서 큰 역할을 맡았을 정도였다.
14세기경 페르시아를 시아파 이슬람이 장악할 때는 유대인들의 상황이 악화되어 차별 대우를 받거나 쫓겨나기도 하고 강제 개종을 당한 적도 있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17세기에 들어서 더욱 심각했는데 고통을 참지 못한 유대인 중 일부는 오스만의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였다.
남의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서러움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버텨온 페르시아의 유대인들이 가장 활발히 활동한 시기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당시 유대인은 이란에서 약 15만 명 정도 살았으며 유대인 신문이 발행되었고 유대인도 이란의 공무원이 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란 전체 인구에서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낮았지만, 1979년 이란 과학 아카데미 회원 18명 가운데 2명이 유대인이었고, 4천 명의 대학 교수 가운데 80명이, 1만 명의 의사 가운데 6백 명이 유대인이었다. 그 당시 이란에 살고 있던 유대인 가운데 오직 1퍼센트만이 최하층이었고, 80퍼센트는 중류층, 10퍼센트는 상류층으로 분류될 만큼 이란의 유대인들의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1948년 5월 14일, 1878년 만에 재건된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할 때만 해도 중동 아랍 국가는 물론이고 서방 국가들마저 새로운 국가 탄생의 승인 여부를 두고 서로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이란은 이슬람 국가 중에서는 튀르키예 다음으로 그리고 중동 아랍 국가 중에서는 가장 먼저 이스라엘의 독립과 건국을 승인하였다.
그 후로 이란과 이스라엘은 곧바로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테헤란에는 이스라엘 대사관이 문을 열었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이란의 원유를 수입해서 사용할 정도로 이란은 미국만큼이나 중요한 나라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이란은 지리적으로도 1,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국경 문제를 두고 다툴 이유도 없었다.
이렇듯 우호적이었던 두 나라의 관계는 1979년 이란에서 일어난 이슬람 혁명을 기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단순히 분위기만 바뀐 것이 아니라 태도가 180도 뒤바뀌어 철천지원수의 관계로 돌변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미국과 주변 아랍 국가,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도 상당 부분 빗나가기 시작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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