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 여성의 욕망을 직조한다는 것은 엠마 보바리에서부터 출발한 여성 독자 모델의 전형이다. 여성은 책읽기를 통해 세계를 확장시키고,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법을 훈련한다. 그러나 여성들이 기꺼이 엠마 보바리가 되는 것은 보바리의 비극적 결말을 몰라서가 아니다. 알면서도 부러 속아주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할리퀸 로맨스와 같은 여성 대상 소설의 독자를 분석하면서 공격적 남성성과 수동적 여성성을 강조하는 가부장제적 로맨스 서사를 여성들은 왜 즐겨 읽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때로 이러한 질문은 훈련받지 않은, 자기 기만적인 지각을 가진 여성들은 소설이 진정으로 말하는 것을 모르거나 그 의미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식의 해석으로 이어진다. 여성 독자를 어리석은 대중으로 두고, 비평가가 여러 겹의 텍스트를 해체하고 분석하여 그 ‘진짜 의미’를 알아내면, 소설의 해석은 완료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래드웨이는 로맨스를 읽는 행위를 분석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텍스트적 특징이나 서사적 디테일에 대한 강박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로맨스 소설 독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래드웨이가 확인한 것은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로맨스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라는 점이다. 이처럼 읽는 재미를 바탕으로 한 자기 충족적 행위가 독서다. 나이, 계급, 교육 수준 등이 저마다 다른 여성들은 책을 통해서 다양한 서사적 장치들을 즐긴다. 『82년생 김지영』 역시 마찬가지다. 『82년생 김지영』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는 문제의식이 있는 것이다. (307~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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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문학은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자각하고, 젠더를 근본적 문제로 삼는 독자 집단과 만나고 있다. 이는 산업화 시대의 농민이나 노동자가 사회의 근본 모순을 재현하던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자 문제를 소설화할 때, 이에 대해서 ‘노동자 정체성의 정치’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이촌향도와 농민의 소외를 이야기할 때에도 ‘농민 정체성 정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은 노동자나 농민보다 더 큰 범주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정체성 정치로 과소 재현된다. ‘김지영 현상’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한국 문단의 상황에 대한 일종 권력 투쟁이다. 정체성 정치가 아니라 미학적, 재현적 가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는 차원에서 감각을 새롭게 분유한 정치다.
이 정치의 행위자가 독자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여성 독자들은 ‘책을 산다’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제를 표현한다. 출판사들이 서둘러 페미니즘 서적을 기획하는 것은 운동 방식으로 등장한 ‘책을 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책을 읽는다’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사회 운동 차원에서도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독서라는 매우 개인적 행위가 새로운 운동의 레퍼토리로 등장했다. 이는 문학이 본래 내재하고 있는 정치적 가능성이다. 상업적 인쇄 매체와 함께 등장한 근대문학이 독자들이 새로운 공동체로서 민족국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토대였던 것처럼,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텍스트가 연대체로서 페미니즘을 구성한다. 그리하여 이제 한국문학은 페미니스트 인식론을 바탕으로 젠더화된 읽기를 하는 독자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신작 소설, 신작 시, 신작 영화 그 모든 것이 ‘젠더’라는 새로운 잣대로 평가하는 경험을 할 것이다. 이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읽고자 하는 독자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기를 기다려본다. (313쪽)
― 허윤, 『위험한 책읽기 - ‘문학소녀’에서 페미니스트까지, 한국 여성 독서문화사』, 책과함께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