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볼이 통통해서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묵은 학부모총회를 앞두고 화장대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대학 졸업 사진을 찍을 때 입었던 정장을 걸치고 아이라인을 짙게 그렸는데도 여전히 학생 같기만 하다. 초등학교 3학년 학부모니 사십대가 많을 테고, 어려 봤자 삼십대일 텐데 묵은 거울 속 자신이 제 나이인 스물다섯으로조차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된다.
이모 옷을 빌리려 방 밖으로 나온 묵은 소파에서 벌리를 끌어안고 잠든 이모를 발견하고 한숨을 쉰다.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삼 주 전에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뉴스다. 이모가 사두었던 미국 주식이 떨어졌다고 투덜거린 것만 기억할 뿐 묵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화면에서는 폭발 장면에 이어 배가 한껏 부른 여자들이 줄줄이 누워 있는 병상을 비추고 있다. 리모컨을 집어든 묵은 전원 버튼에 손을 얹은 채로 바닥에 앉는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아파트 지하에 마련된 방공호라고 한다. 대리모들이 신생아 열아홉 명과 함께 갇혀 있다는 리포터의 설명이 이어진다. 우크라이나는 대리모 출산 1위 국가로, 현재 전 세계에서 우크라이나 대리모의 출산을 기다리는 사람이 팔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묵은 이모가 뒤척이는 소리에 흠칫 놀라며 자신이 이제껏 숨죽이고 있었다는 걸 안다. 다행히 이모와 벌리는 아직 곤히 잠들어 있는 듯하다. 묵은 둘이 깰까봐 걱정하면서도 회색 콘크리트 벽에 기대 아기를 끌어안고 울먹이는 대리모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1부
인우
1
인우는 몸을 구부려 초음파 사진을 끼워놓은 액자를 집어들었다. 삼 주 전에 찍은 정밀 초음파 사진 속, 코가 오뚝한 아기의 옆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액자를 들고 냉장고로 향했다. 메일에 함께 첨부되어 있던 다른 사진들이 냉장고 문에 빼곡이 붙어 있었다.
아기의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 왼쪽 귀와 오른쪽 귀. 콧구멍. 무지개처럼 휘어 있는 척추. 엉덩이. 심장의 좌심실과 우심실, 좌심방과 우심방. 활짝 핀 꽃 모양의 뇌.
사진을 하나씩 쓰다듬다가 인우는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아직도 메일이 오지 않았다. 인우는 아기가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는 영상과 손을 빨고 있는 영상을 연달아 보았다.
아기의 심장 소리를 틀어놓고 임신 일지를 펼쳤다. 공책 한쪽에는 임신 주차별 신체 변화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24주부터 태아의 피부는 불그스름하게 변하며 폐가 발달해 자발적으로 호흡을 하기 시작한다. 태아의 청각이 완성되어 소리 자극에 반응한다.
인우는 나지막이 흥얼거렸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아기가 심장을 쿵쿵 울리며 인우의 노래에 화답했다. 빗소리가 들렸고, 인우는 스피커의 볼륨을 올렸다. 아기의 심장 소리가 온 집을 가득 채웠다.
임신 24주 차의 엄마는 한눈에 봐도 배가 불러 있고, 배꼽이 튀어나온다. 요통이 있고, 다리가 붓는다. 튼살이 생길 수 있으니 크림을 잘 발라줘야 하며, 염분 제한과 식이 조절로 체중이 급격하게 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우는 자신의 홀쭉한 배를 어루만지면서 펜을 바쁘게 움직였다.
아가야, 지금도 네가 발로 쿵쿵 차는 게 느껴져. 엄마는 평생 말라서 살 좀 찌우란 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이렇게 나온 배가 신기하기만 해. 배가 부풀어오를수록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붓고 힘들지만 너의 태동을 느낄 때면 이 모든 게 아무렇지도 않아. 아니, 도리어 감사하지. 아가야, 고마워. 내게 와줘서.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조금씩 커지더니 아기의 심장 소리에 끼어들었다. 인우는 소파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쿠션을 들어 원피스 아래로 넣고 커튼을 열었다. 청회색의 바다와 백사장 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낮에 가득했던 인파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름 내내 사람이 바글거릴 게 분명한 해수욕장 인근의 아파트로 온 건 인우의 선택이었다. 혹시라도 여름휴가를 온 지인을 마주칠까 두려워 밖에 나가지 못했지만, 창문을 열면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흡족했다. 인우는 매일 창문을 열어놓고 바다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바다 건너 자신의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상상했다. 창밖으로 휴대폰을 내밀어 녹음한 파도 소리를 대리모에게 전해달라고 김실장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인우는 커튼을 닫고 김실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도 메일을 받지 못해서요.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이제까지는 매주 수요일, 늦어도 목요일에는 대리모의 정기검진 결과를 메일로 받아왔다. 김실장은 예약서를 쓸 때부터 정기검진 메일이 늦더라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하루이틀 늦는 건 늘 있는 일이고, 클리닉과 대리모의 사정에 따른 거지 자신을 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그러나 임신 24주 차에 이르기까지 메일이 목요일을 넘기는 경우는 없었다. 금요일이 되어서도 메일이 없다니. 인우는 김실장의 말을 기억하면서도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오후 네시에 보낸 메시지에 일곱시 반까지 답이 없었다. 태국 시각으로 다섯시 반. 방콕의 클리닉이 문을 닫기까지 삼십분이 남아 있었다. 이대로 클리닉이 문을 닫으면 다음주 월요일까지 인우는 사흘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김실장은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인우가 클리닉에 직접 전화해봤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태국어 안내음을 녹음해서 통역기에 돌리니 응답 신호가 없다는 말이 나왔다. 전화가 끊겨 있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같은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구글 맵에는 분명 영업중으로 나오는 클리닉 전화가 왜 연결되지 않을까. 인우는 휴대폰을 한참 쏘아보았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태국어 안내음만 반복해서 듣고 있으려니 어지러웠다. 브로커인 김실장과 연락이 닿지 않고, 대리모 시술을 진행한 난임 클리닉은 영업시간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인우가 대리모를 구해보겠다고 했을 때 사기를 운운하며 반대하던 지석의 말이 떠올랐다.
인우는 대리모 신상 명세가 적힌 파일을 꺼내서 전화번호를 찾았다. 대리모와의 연락이 금지된 데다가 언어가 통하지도 않으므로 직접 전화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규칙 따위를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인우는 태국어 통역기를 켠 채로 전화를 걸었다. 조금 전과 같은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전원이 꺼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기를 데리고 도주한 대리모가 등장하는 저급 할리우드 영화들이 인우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숨이 가빠왔다. 인우는 양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크게 숨을 쉬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밖이 깜깜했다. 어둠 속에서도 빗줄기는 여전히 거세게 창문을 때렸다. 인우는 캐리어를 꺼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원피스 안에 쿠션을 집어넣고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캐리어를 끌고 아파트를 나서면서 서울 집에 머무르고 있는 지석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당장 태국에 가야겠어. 지금 서울 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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