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할머니 집은 기차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우리 강아지라고 불렀다. “우리 강아지, 오느라 얼마나 고단했냐.”라며 손을 잡고 꼭 안아 주던 할머니의 품에서 나는 부끄러워하며 슬그머니 어깨를 빼곤 했다. 지금이었다면 폭 안겼을 텐데,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떠나고 이제 안 계신다. 서울로 돌아갈 때면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떠나고 이제 안 계신다. 서울로 돌아갈 때면 할머니는 꼭 역까지 배웅을 나와 기차 안까지 따라 들어올 수 있는 입장권을 끊었다. 그 무렵 환송객들은 표 끊는 곳 앞에서 헤어져야 했고 역에서는 출발 직전까지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승강장 입장권을 팔았다. 할머니는 직접 기차 좌석에 앉는 걸 보아야 마음이 놓인다면서 괜찮다고 손사래 치는 내게 꼭꼭 접은 종이돈과 간식 꾸러미를 쥐여 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강아지는 멀리 갈 사람 아니냐. 가다가 출출하면 이것저것 꺼내서 먹고. 먼 길 가려면 속이 든든해야 하니라. 할머니 걱정은 말고, 우리 강아지 서울 가서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고…….” 곧 기차가 떠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면 할머니는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고 객차에서 내렸다.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는 동안 창문 밖으로 끝까지 손을 흔드는 할머니의 작은 몸이 보였다. 혼자가 되고 나서야 꾸러미를 열면 삶은달걀이랑 귤, 요구르트와 연양갱, 땅콩샌드, 스피아민트껌과 한 줌의 하얀 누가사탕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최선을 다해 ‘우리 강아지’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챙겼을 테고, 나는 너무나도 할머니 같은 과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멀리 갈 사람. 할머니가 나를 이렇게 부를 때마다 나는 내가 도착할 곳이 어느 아득한 미래 세계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린이는 귀하다. 오늘로부터 가장 멀리 떠날 사람이기 때문에 매 순간 소중하다. 어린이는 우리 곁은 떠나 늘 멀리 간다. 용감하게 떠나는 것이 어린이의 일이라면 정성껏 돌보고 사랑을 주어서 잘 보내는 것은 어른의 일이다. 첫 걸음마를 뗄 때 비틀비틀 두 발을 디디며 우리를 등지고 선 아기의 뒷모습은 웅장하고 애틋하다.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가 뒤에 선 어른을 믿고 자전거 핸들을 꽉 붙잡은 채 페달을 구를 때, 몰래 손을 놓으면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라고 그들을 힘껏 밀어 준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하여 낯선 교실에서 집을 그리워하던 어린이는 훌쩍 자라서 집 아닌 어느 곳에 앉아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친구의 비밀을 들어 주며 귀가를 미루고, 가끔은 일기장에 엎드리며 쓰던 글자를 손등으로 감추게 된다. 눈물범벅이 되어 어깨를 들먹이는 아이의 슬픔 안으로 들어가 줄 수 없는 날도 찾아온다. 아이가 품에서 멀리 떠날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작은 꾸러미와 간절한 응원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할머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어린이는 멀리 갈수록 큰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곳에 닿아서, 한번도 만나지 못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경이로움과 친구가 되어 도전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어디쯤에서 사무치게 외롭고 뜨겁게 열병을 앓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곳까지 따라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멀리 가는 어린이를 맞아 줄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멀리 있는 어떤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은 아마도 친구, 어쩌면 어른, 이웃집 할머니일 수도 있다. 멀리서 그의 손을 잡아 줄 누군가의 몫이 커지는 날은 반드시 온다. 그리고 나와 당신은 그 새로운 손이 되어 줄 수 있다. 먼 곳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어린이를 가까이 맞이하고 다음 꾸러미를 주며 더욱 먼 곳으로 떠나보낸다. 오늘의 어린이는 날마다 생소한 세계로 떠난다. 가까운 어른의 기도로만 아이를 기르던 시대는 지났다. 어린이가 안심하고 훨훨 날아가려면 좋은 사람들이 숲의 나무처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충분히 먼곳에 서서 달려오는 한 아이를 힘껏 안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쏜살같이 달라지는 세상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은 두려움의 연속이다. 겁이 나니까 익숙한 곳으로만 보내겠다는 건 슬기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떠나는 아이의 손을 놓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 우리에게 힘을 주는 건 어린이의 용기다. 흔들릴 때마다 어린이의 결심에서 배운다. “잘 다녀올게요.”라는 말이 뭉클한 것은 그들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는 믿음이 우리를 울리고, 우리를 살린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어린이와 헤어진다. 우리가 마중 나갈 수 없는 그곳에서 어린이들은 어느새 어른이 된 친구들과 함께 뒤따라 올 어린이들을 지키며, 그들의 등을 두드리고 밀어 주면서 살아갈 것이다. “잘 다녀올게요.”라는 약속은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지켜진 약속이면서, 지켜진 적이 없는 약속이기도 하다. 그들은 마침내 우리가 도달하지 못하는 먼 나라의 멋진 영웅이 되었을 테니까.
나는 이 책에 어린이와 어린이책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처음 동화를 쓰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1990년대 초반, 이십 대부터 나는 틈만 나면 어린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나에게 어린이와 어린이책은 훼손 없는 상상의 스승이었다. 시작할 때는 그들에게서 배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부둥켜안고 있었다. 어린이는 말랑한 손바닥을 선뜻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쿵쿵 발을 구르고, 가끔은 품에 파고들어 흐느끼며 촉감과 진동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 심장소리를, 생생한 촉감을 놓치는 순간 어린이를 잃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그때마다 마음을 적어 온 기록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공간에서 이 마음을 남기도록 오래 격려해 주신 고마운 분들이 있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드린다. 동화를 처음 써서 발표하고, 그림책을 우리말로 옮기고, 동화와 청소년문학을 비평하거나 연구할 때보다 부드러운 이 책 한 권을 내놓는 지금이 더 무겁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옛날 기차 안에서 웃으며 내렸던 할머니처럼 보낼 줄 아는 어른이 되었으니까, 이 책을 좌석에 두고 내리며 손을 흔든다. 오늘의 어린이를 환송하며,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동료, 먼곳의 여러분을 믿으며.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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