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잠자리
흙먼지에 쌓여 지나온 마을
멀리 와 돌아보니 그곳이 복사꽃밭이었다
어둑어둑 서쪽 하늘로 달도 기울고
꽃잎 하나 내 어깨에 고추잠자리처럼 붙어 있다
해 질 녘
꽃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인다.
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나무와 산과 마을이 서서히 지워지면서
새로 드러나는 모양들.
눈이 부시다,
어두워오는 해 질 녘.
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
당신은 시간을 달리는 사람
복사꽃 살구꽃이 피어 흐드러지고 안개를 뚫고 햇살이 스민다. 나는 먼 나라, 더 먼 나라로 가는 꿈을 꾸면서. 당신과 함께 나의 스물에.
종일 나는 거리를 헤맨다. 문득 기차를 타고 가다가 산역에서 내리기도 하고. 모차르트를 듣고 트로츠키를 읽는다. 당신의 눈빛에서 꿈을 놓지 않으며. 당신은 나를 내 나이 서른으로 이끌고 가고.
세상은 어둡고 세찬 바람은 멎지 않는다. 나는 집도 없고 길도 없는 사람. 달도 별도 없는 긴 밤에, 빈주먹을 가만히 쥐어보면 문득 내 앞에 나타나는, 당신은 나의 마흔에서 온 사람.
조금은 서글퍼서 조금은 아쉬워서, 몇발짝 뒤처져 남을 따르면서, 분노하고 뉘우치고 다시 맹세하다가. 마침내 체념하고 돌아설 때 가만히 내 손을 잡아주는, 당신은 나와 나이 쉰도 예순도 더불어 하면서.
이제 내 곁에 와 서 있다. 내가 지금껏 알지 못한 세상의 기쁨을 알게 하면서,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세상의 아픔을 보게 하면서. 내 빛과 그늘을 모두 꿰뚫고서, 당신은 시간을 달리는 사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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