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이 ‘현대 세계’에서의 문학의 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나는 충격적인 슬로건을 골랐다. 깃발처럼 요란한,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약간은 도발적이기도 한 슬로건이다. 사실 내가 느끼기에, 우리 중 일부는 문학을 의심하고, 문학의 가치와 힘과 유용성, 그 미래를 의심하는 듯한데, 심지어는 동료 교수들, 동료 작가들, 나의 여러 독자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불신은 간단히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돈이 안 돼, 옛날엔 몰라도 이제는 돈이 안 돼.
벌써 십여 년 전 일이지만, 리샤르 미예는 “문학의 빈곤화에 관한 시론”이라는 부제를 단 《유령 언어》2012년를 펴낸 바 있다. 리샤르 미예는 은둔자이자 독자가 거의 없는 추방자지만, 문학의 상황에 대한 그의 비관적인 진단은 당시만 해도 급진적인 편이었으나, 지금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 것 같다. 그는 왜 자신이 프랑스 문학이 몰락하고 있다고 보는지 설명하면서, 프랑스 문학의 종말을 예언했다. 프랑스 문학의 미국화와 상품화그가 한 표현이다를 고발했고, 상업적이지 않은 소설이 점점 더 적게 출판되고 시상식 시즌에 주로 판매된다고 주장했다. 리샤르 미예는 전작 《문학에 대한 환멸》2007년을 출간한 후 가진 한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죽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라고 한탄한 뒤, 죽은 것은 바로 “문학적이고 보편적인 국가로서의 프랑스”라고 명시했다. 이 끔찍한 패배주의는 오늘날 널리 퍼져 있으며, 적어도 지배적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에 굴복하길 거부한다.
얼마 전, 오랜 경력을 가진 친한 출판업자에게서, 자기 일의 관건은 예술과 돈인데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가 참 쉽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 ‘돈argent’은 곧 ‘네가르négart’, 즉 예술의 부정이다. 키케로에서부터 몽테뉴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대 지혜와 인문주의 전통에서, 네고티움negotium, 무역, 상업, 비즈니스이 문학적 여가otium litteratum, 공부하는 휴식otium studiosum, 식사의 평온otium cum dignitate을 가리키는 말 오티움otium의 부정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 내가 얘기하려는 것은 문학의 비용과 이득에 대해서, 책과 돈의 관계에 대해서다.
시장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렇게 묻게 된다. 문학은 투자로서 어떤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어떻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가 독서에 투자해서 어떤 수익, 어떤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가? 사실 독서에는 시간이, 많은 시간이 들고, 글쓰기는 더욱더 그러하다. 한데 우리는 점점 더 시간을 절약하려 하고, 일을 빨리 처리하려 하고, 생산성을 개선하려고 한다.
“문학은 돈이 된다!” 요점만 간단히 말하면, 나는 이 슬로건을, 유통업자들은 크게 고려하지 않고, 다음 두 가지 방향으로 개진할 생각이다. 하나는 “그것이 저자에게 얼마나 수익이 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독자에게는 또 얼마나 수익이 되는가”이다. 이를 위해 나는 여러 해 전부터 여러 가지 기회로 했던 강연들, 아테네에서 도쿄로, 아부다비에서 라바트로, 암스테르담에서 이스탄불로, 브뤼셀에서 빌니우스로, 베이루트에서 티미소아라로, 부카레스트에서 서울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텔아비브로, 시카고에서 프라하로 등, 지구촌 곳곳으로 옮겨 다니며 했던 강연들을 모아볼 생각이다. 그 밖에도 프랑스 국립도서관·고등경제통상학학교·국립고등교량도로학교·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한 강연도 있고, 툴루즈·몽펠리에·낭트·스트라스부르에서 한 강연도 있으나, 이 책의 슬로건으로 삼은 강연을 할 기회를 가진 것은 2012년 9월 베르나르 라마낭소아의 초청으로 경영대학원인 HEC에서 개강을 맞이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문학에 경의를 표하고 독서를 예찬하고자 한 강연이 유일한 것 같다. 그간의 생각들을 책으로 다듬을 기회를 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그분들께 미처 전하지 못했던 그 생각들이 이제야 이 책을 통해 정리되었다.
시는 수익성이 가장 높은 예술이다
아주 분명한 첫 번째 관점인 수익성, 즉 작가가 문학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라는 문제는 길게 얘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펜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는 거의 없다. 좋게 말해서 그렇다. 사실, 다른 수입원이 없는 작가들 대부분은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프루스트나 지드처럼 연금으로 사는 이들이 글을 썼다. 지금은 교수들, 기자들, 편집자리샤르 미예도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했다나 공무원 혹은 여타 월급쟁이들이 글을 쓴다. 문화부 장관의 의뢰로 브뤼노 라신이 2020년 1월에 제출한 보고서 〈작가와 창작 활동〉에 의하면, 최저임금의 절반 정도인 연간 9,000유로 이상의 인세 소득을 올린 작가는 15퍼센트뿐이다.
현재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시집이자 사람들 대부분이 19세기 시, 즉 프랑스 시 전체를 대표하는 시집으로 꼽는 《악의 꽃》의 저자 보들레르는 신문 편집자들에게 작품 게재를 간청하고 어머니에게 수시로 도움을 요청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가 평생을 문학에 투자하기로 한 것은 오판이 아니었다. 이미 1846년에 그는 이렇게 썼다. “시는 수익성이 가장 높은 예술이지만, 이 투자는 늦게 수익을 올린다. 대신 큰 수익이다.” 이는 그가 〈문학청년들에게 주는 충고〉에서 하는 말이다. 당시 보들레르는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지만, 문학이라는 직업에 따르는 위험을 잘 알고서, 어른스럽게도 후배들을 좀 보살펴주어야겠다고 느낀다. 물론 이런 그의 생각에 아이러니가 없는 건 아니나, 어쨌든 이는 현대의 문학 체제에 대한 그의 명철한 의식을 잘 보여준다.
이 시인은 작은 신문과 잡지에 겨우겨우 원고를 게재하곤 하던 그런 거래에 기대어, 보헤미안의 삶, 저주받은 예술가의 삶을 극도의 궁핍 속에서 근근이 이어갔던 것 같다. 그는 끊임없이 돈을 꾸러 다니고 소리소문없이 셋방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의 삶은 마지막까지 재정적으로 절망적이었고 불안정의 표본이었다. 어렵사리 시나 글 하나가 게재되더라도 그에게 돈이 되어주지 않았다. 빚을 청산하여 클리쉬 거리의 교도소에 수용되는 신세를 면하는 데 쓰였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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