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에서 시작한다
우선 문장을 하나 쓴다. 낚싯대 끝으로 느끼는 손맛처럼, 단어들이 어떻게 어울리면 좋을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간질인다. 그러면 문장을 머릿속으로 읽어본다. 형태를 떠올리며 자판으로 옮긴다. 크게 읽으면서 노래처럼 들리는지 확인한다. 음절 하나를 바꾸고 맞추고 다듬고, 단어를 구절로 또는 구절을 단어로 바꾼다. 다른 문장 옆에 두고 어울리는지 확인한다. 전부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내가 지구에서 보낸 시간을 종류별로 구분한 도표가 있다면 누구나 하는 일, 그러니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은 문장을 쓰는 시간이 차지할 것이다. 하루에 글을 얼마나 쓰는지 세지는 않지만, 만일 세어본다면 단어가 아니라 문장 수를 헤아릴 것이다. 문장은 나의 핵심 생산물, 언어의 작업장에서 만들어내는 소형 제품이다. 작가가 된다는 건 아무래도 확인 도장과 승인 과정이 필요해 보이지만 내가 하는 일은 그보다는 매일 할당량의 문장을 채워가는 일에 가깝다. 나는 1년에 3천5백 문장 정도를 쓴다. 이 정도면 한 사람이 쓰기에 너무 많은 걸까, 조금 부족한 걸까, 아니면 적당한 걸까? 한 문장을 쓰고 다음 문장을 쓴다. 충분하다 싶을 때까지 되풀이한다. 충분하다 싶은 게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 머릿속의 문장이 밖으로 내보내달라고 아우성친다고 말한다. 플로베르는 문장들 때문에 “좀이 쑤신다”고 했다. 이런 작가는 인간에게 무작위로 귀를 실룩거리는 능력이 주어지듯 단어를 배열하는 재주를 타고나는 모양이다.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지만, 대신 나는 조화로운 문장을 듣고 알아볼 수 있다. 좋은 문장이 어떤 모습이고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알기에, 나의 글에 보이는 괜찮은 문장을 잊지 않고 그와 비슷하게 재현하려고 노력하는 감각이 좋다. 볼품없는 재능에도 보상이 주어진다. 나는 단어들을 어떻게 만나게 할지, 이 문장이 저 문장보다 훌륭한 이유가 무엇인지 골똘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팅게일은 자기 목청에서 어떻게 그런 황홀한 소리가 나오는지 모르지만, 나이팅게일을 흉내 내는 인간은 모든 음을 분석해야 한다.
내가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인지 몰라도, 학교에 다니고 있든 그보다 나이가 많든, 우리는 모두 문장으로 게임을 한다. 문장은 글쓰기의 공유 자원, 모든 작가가 발을 내딛는 공동의 지면이다. 시인도 문장으로 글을 쓰지만 “문에 물건이 끼면 시간이 지연됩니다”나 “서늘하고 건조한 장소에 보관하세요” 같은 문장을 쓴 무명의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작가는 문장으로 글을 쓴다. 아무리 어리숙하고 부주의한 작가여도 흩뿌려진 대문자와 마침표, 그 사이 놓인 글자들이 문장이라는 보편적인 통화로 바뀌기를 염원한다. 우리는 문장을 만들면서 글쓰기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배운다. 이 종잡을 수 없이 아름답고 혼란스러운 난장을, 그러니까 인생을, 문장으로 아주 잠시 이해한다.
원칙주의자의 변명
케임브리지대학교 수학과 교수였던 G. H. 하디는 은퇴를 앞둔 1940년에 일생의 연구를 변호하는 책을 출간했다. 하디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수학인 정수론을 연구했고, 그의 책은 이해하려는 사람도 드문 무용한 일에 일생을 바친 이유에 대한 고백이다. 제목은 ‘수학자의 변명’이지만 그다지 변명하는 투는 아니었다.
하디는 수학이 자신의 인생에 “위대하고 영원한 행복”을 안겨주었다고, 세상이 전쟁으로 자멸하고 있을 때 숫자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평행 우주에서 위안을 얻었다고 단언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포스교의 체적이나 무선송신기의 도달 범위를 계산하는 응용수학은 “하찮다”고 몰아세웠다. 하디에 따르면 진짜 수학은 순수한 추상을 좇느라 이 세상에 관심이 없다. 수학은 아주 드문 경우에, 전혀 의도치 않게 쓸모 있다. 아인슈타인처럼 하디는 무엇보다 등식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화가나 시인처럼 수학자는 패턴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썼다.
수학의 등식과 활자화된 문장은 닮은 점이 많다. 대칭과 균형에 의지하고, 일견 달라 보이는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가능한 우아하고 간결하게 현실을 풀이한다. 무작위하게 나열된 것들을 필연적인 이유로 깎아내고, 불완전하고 일관성이 없는 것들을 등호 또는 절을 사용해 제자리에 놓는다. 세계를 향해 무언가 말하면서도 그 자체의 아름다움 속에서 유영한다.
하디 같은 순수수학자들은 긴 시간 논쟁했다. 수학의 진보는 발명되는가, 아니면 발견되는가? 우아한 방정식은 인간이 공들여 만들어낸 작품인가, 아니면 운 좋은 누군가가 우연히 발견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영원불멸한 진리인가? 우아한 문장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 또한 발명과 발견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아한 방정식처럼 우아한 문장은 만든 이에게서 벗어나 자유롭게 부유하며, 그 존재가 필연적이라는 기운을 뿜어낸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나와 어느덧 세상에 자리한다.
문장의 형태와 소리에 골몰하며 의도와 형식의 올바른 조응을 찾는 일은 하디의 수학만큼이나 실세계와 동떨어져 보일 수 있다. 하디가 책에 썼듯 인간의 언어는 사멸하지만 숫자는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하디가 수학에 마음을 쏟듯 문장에 마음을 쏟으려면, 하디가 숫자를 대하듯 문장을 대해야 한다. 문장이 세상을 설명하고 해명하려 하는 그 순간에도 문장의 뒤에는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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