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제를 돌아볼 것
어디서 시작하면 좋을까? 현대의 고전을 읽는다면. 고전 문학에 대해 강의할 때마다 받는 질문이다. 조금 비껴가보자.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고 오늘이 내일을 만든다. 그렇게 중요한 오늘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싶다면 어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을 만든 어제는 언제쯤일까? 거기서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언어의 관점에서 보면 구술언어 시대일 것이다. 구술언어가 화석을 남겼을 리 없다. 문자언어에 흔적이 조금 있을 뿐이다. 그 근원적인 문제의식으로 가득한 책이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1982다. 질문한 분에게 이 책을 권하면 대개는 듣보잡이라는 표정이다. 그러면 출판 이력부터 말해준다.
처음 번역되고 40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절판된 적 없고 개정 3판까지 이어져온 책이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프로 독서가들이 사랑한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들은 가까운 사람에게만 살짝살짝 알렸던 것 같다. 텍스트의 이면을 꿰뚫고 싶다면 이 책으로 시작해봐. 세상에, 그런 책이? 조금 놀랐다면 ‘언어학, 세계를 비추는 거울에 대한 이해’라는 장부터 읽어보시길 바란다. 이 책,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는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책에 담긴 스물여섯 편의 작품은 오늘 우리의 세계를 균열하는 힘을 가진 것들이다. 시작할 때는 고전 문학fiction 작품만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나 해석과 분석 도구를 마련해줄 논픽션을 빼놓을 수 없었다. 결국 열아홉 편의 픽션과 일곱 편의 논픽션이 되었다.
논픽션 중 하나가 문과스러운 제목의 『우연과 필연』이다. 우연히 생겨나 필연이 된 생물의 근본 조건을 다룬다. 1965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자크 모노의 철학적인 과학책이다. 벌써 55년이나 지난 저작물임에도 여전히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거의 모든 과학책은 오래전에 업데이트되었고 빠른 속도로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에도 업데이트되지 않은 아마도 유일한 과학책일 것이다! 그 깊고 넓은 통찰력이 대체 어떤 텍스트에 담겨 있는지 봐둘 필요가 있다.
다른 다섯 권의 논픽션은 ‘시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시선은 권력과 통제, 갈등과 저항을 야기한다. 계급 구조가 분명한 갱들 집단을 다룬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면전에서 똑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눈을 내리깔아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시선을 받으면 나는 객체가 되고 그에 의해 규정된다. 저항하는 법은 내가 그를 응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관계를 헤아리고 타이밍을 엿봐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내가 주체가 되어 그를 객체화하고 규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시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감시당한다. 조직의 존속을 위한 통제의 ‘시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조직이든 만들어지고 나면 모두 이와 비슷한 속성을 갖게 된다. 한 국가라면 더더욱. 다른 점이 있다면 형식의 차이 정도일 것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식수·클레망의 『새로 태어난 여성』, 보부아르의 『제2의 성』, 길버트·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까지 모두 오늘 우리의 정체를 규정하는 시스템의 ‘시선’을 다룬다. 그 시선의 형식과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나면 문학 텍스트의 행간에 담긴 이야기들을 캐낼 수 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끼워넣어 깊이 파헤쳤다. 그 장의 제목은 ‘암시와 은유·생략이 하는 말, 문학의 언어’다. 그런 유에서 최고의 작품이 브론테 자매의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개한 문학 작가 가운데 유럽 또는 미국에서 풍부한 문화자본을 누리며 성장한 이는 넷밖에 없다. 울프, 사르트르, 엘리엇, 르 귄이다. 이들은 모두 ‘바벨의 도서관’에서 무궁무진한 텍스트의 우주를 누빈 경험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엘리엇의 독서량은 당시 평균적인 지식인들의 다섯 배쯤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경험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올랜도』를 썼다. 자유분방하고 쾌활한 어조로 영국 역사를 조롱하며 여성 섹슈얼리티의 진실을 은밀하게 드러낸다. 장폴 사르트르는 주류 이데올로기로 가득한 도서관에서 느낀 욕지기를 털어놓았다. 그것이 『구토』다. 조지 엘리엇은 뛰어난 여성이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못하고 한계에 갇힌 비극을 『미들마치』에 담았다. 아이러니한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아린다. 어슐러 르 귄은 아예 모순으로 뒤엉킨 지구를 떠났다. 겨울 행성에서 양성평등에 대한 구체적인 시뮬레이션을 해 보인 것이다. 그곳에는 성 구분 없이 모두가 양성인이다. 이 작품들 모두가 매우 현대적인 문제의식 아래 세계를 균열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주류의 삶을 살았지만 변화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작가들이 던지는 어젠다와 그들 나름으로 내놓은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일곱 작품의 작가들은 이른바 ‘주변 국가’ 출신이다. 쓰기 싫은 용어지만 ‘주변’이란 말에 담긴 표면적 의미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 결국 프랑스나 영국, 또는 미국으로 연결된다. 페루의 군사학교 이면을 통해 억압된 인간의 일탈을 그린 바르가스 요사의 『도시와 개들』이나 헝가리 전쟁고아의 끔찍한 성장과정을 보여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에 대한 세 가지 거짓말』, 칠레의 여성 4세대의 미시사에 담긴 혁명성을 드러낸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은 모두 지역적인 사건을 다룬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그 문학성을 인정받고 미국에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한다. 크리스토프의 경우 엄청난 판매량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리고 작가들은 프랑스나 스위스, 미국에서 살아간다. 사실 대부분의 ‘주변 국가’ 작가들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뒤 설사 이주하지 않는다 해도 프랑스나 미국에 머문 기간이 길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사용한 문학적 기법은 서구 문학의 전통에 뿌리를 둔 것이다. 작품 이면에 담긴 보편성은 중앙의 균열을 목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끔찍한 독재국가로 변한 미국을 다룬 『시녀 이야기』는 캐나다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이고, 작가의 더블이 수없이 등장하는 페미니스트의 『금색 공책』은 로디지아/짐바브웨 출신인 도리스 레싱의 것이다. 때 이른 부조리극의 탄생을 예고한 『소송』의 작가 카프카는 체코 출신이며, 그 유명한 『이방인』의 작가 카뮈는 알제리 출신이다.
주류 문학사에서도 최고의 영문학 작품으로 인정받는 작가들은 변방에서 성장했고 개인의 천재성으로 세계에 틈을 내는 작품을 썼다. 아일랜드 출신의 제임스 조이스는 영문학에서 가장 난해한 모더니즘 작품을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머스트must 현대 고전문학 목록의 최상위에 오른다. 『율리시스』는 위에서 말한 최고의 분석 도구로 무장한 독서가라면 더없이 즐거운 지적 유희를 누릴 수 있는 작품이다. 더구나 이것은 서구 문화의 기원인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에 연결되어 있다. 최소한 같은 수준의 난해한 작품으로 꼽히는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 역시 제 독자에게는 더없이 깊은 즐거움과 함께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의미한 의미를 다룬다는 점에서 난해하다. 아이러니로 뒤범벅된 의미뭉치를 풀어내지 못하면 텍스트를 이해하기 어렵다. 부조리극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베케트는 에필로그에서 다루려다가 길어져서 따로 떼어냈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매우 특이한 소재를 다뤘다는 점에서 난해하다. 몇 달 동안 바다만 보이는 망망대해의 풍경과 거대한 고래와 싸우는 선원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고래 내부로 들어가 기름을 짜내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들을 모두 번역이 어렵기에 최근에야 읽을 만한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의 해설도 실체가 부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었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아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주제를 담은 작품이다. 개인의 명예를 박살낸 황색언론지의 기자를 총으로 쏴 죽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언론을 상대로 싸우려 하지 않는다. 작가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작가’ 뵐은 언론을 향해 직설어법으로 포문을 열고 쏘았다. 이 작품 역시 맥락과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더 깊은 의미를 새길 수 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속해 있는 포스터모던 시대에 고전이 될 만한 작품도 하나쯤은 포함시켜야 했다.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그것이다. 유명한 소설가 플로베르를 추적하는 아마추어 평론가의 고뇌를 다룬 에세이처럼 읽히지만 그 이면에는 살인 사건이 감춰져 있다. 표면과 이면의 관계를 아이러니라는 문학적 어법으로 이렇듯 재치 있게 다룬 작품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오늘의 정체를 파악해서 그 세계를 균열하는 픽션과 논픽션을 엄선했다. 후보 명단에서 두 번 읽고 제외한 작품도 많다. 소개한 것들은 적어도 네 번은 읽었다. 말을 바꾸면 네 번 이상 읽어도 여전히 읽는 즐거움이 줄지 않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다루지 못해서 안타까운 작가도 많다. 보르헤스, 루슈디, 쿤데라, 하루키, 모옌, 토카르추크, 모리슨…… 오늘의 정체를 보여주며 세계를 균열하는 작품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한꺼번에 보여줄 방법은 없다. 어느 정도 선에서 일단락해야 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