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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어린이를 잇는 ‘말하기’
초등학교 3학년 서진이는 학교 가기를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어린이입니다. ‘우리 반을 제일 재미있는 반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으로 많은 표를 얻어 학급회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서진이의 골칫거리는 독서 기록장 채우기 숙제입니다.
어머니가 끙끙대는 서진이를 도우려고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는지, 느낌이 어땠는지 물으면 서진이는 펄쩍 뛴다고 합니다.
“자꾸 물어보면 나 이제 책 안 읽을 거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독서 기록장 때문에 괴롭지 않은 어린이는 드물 것입니다. 어린이의 독서를 도우려는 독서 기록장이 오히려 독서 스트레스를 더하는 셈입니다. 독서 기록장의 형식이 아무리 다양해도 ‘쓰기’를 힘들어하는 어린이에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써야 되는 게 매번 바뀌어서 힘들어요”라고 호소하는 어린이도 있습니다.
저는 독서 기록장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의 독서 상황을 살피고, 책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는 다양한 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독서 기록장은 중요한 교육 도구입니다. 어린이가 책을 읽도록 유도한다는 것도 큰 역할입니다. 그래서 어떤 부모님은 “독서 기록장이라도 있으니까 아이가 책을 읽는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것을 어린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독서 기록장 때문에 책을 읽는다’가 됩니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독서의 목적이 독서 기록장 쓰기가 되어버렸으니 말입니다.
어린이가 독서 기록장이나 독후감 쓰기를 어려워하는 것은 글쓰기가 많은 생각과 집중력, 물리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글쓰기는 손과 팔에 힘을 주어야 하는 활동입니다. 부모님이 직접 해보시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아이의 책이 아니라 어른 책 중에서 최근 읽은 것을 하나 골라 독서 기록이나 독후감을 연필로 적어보세요. 짐작만 해보지 말고 실제로 해봐야 합니다. 그것을 ‘윗사람’이 검사한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 됩니다. 어른보다 글쓰기 경험이 적은 어린이들이 마주하는 상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들과 책에 대해 ‘말하기’를 하면 달라집니다.
서진이를 만나 수업을 시작하면서 그림책 『1999년 6월 29일』데이비드 위즈너 글·그림, 미래아이을 읽고 별점 평가를 했습니다. 별 다섯 개가 만점인데 서진이는 이 책에 네 개를 주었습니다.
“별 네 개면 꽤 좋은 점수네! 네 개나 받은 이유는 뭐고, 하나를 놓친 이유는 뭘까?”
“저는 상상력이 있는 책을 좋아하거든요. 이 책은 그런 엄청 큰 채소들이 나오니까 상상력이 좋고요, 또 다음에 어떻게 될까 계속 상상하게 하는 점도 좋았어요. 그래서 별을 네 개 받았어요. 그런데 마지막 장면 다음에 무슨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은데 금방 끝나서 그게 아쉬워요.”
다음 주에 읽고 온 『이웃집 공룡 볼리바르』숀 루빈 글·그림, 위즈덤하우스에는 별 다섯 개를 주었습니다.
“실제로는 공룡이 멸종했는데 책에서는 아직 살아 있다고 한 점이 상상력이 좋고요, 뉴욕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공룡을 못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이 공룡이 엄청 큰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도 재미있었어요. 글자는 별로 없지만 책이 두꺼워서 다 읽었는데도 아쉽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서진이는 자신의 상상력도 저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독서 공책을 한 권 마련했습니다. 제가 책을 읽어주면 그것을 듣고 상상해서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진이는 제가 읽어주는 내용을 집중해서 듣고 잘 기억한 다음 한 장면 한 장면 공책에 채워 나갔습니다. 서진이가 주도해서 독서 후 활동을 만들어 간 것이지요. 저의 제안으로 이 공책에 읽은 책의 제목과 별점을 정리하는 부분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서진이만의 독서 기록장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제가 초보 선생이었다면 아마 서진이가 별점의 기준을 말했을 때 “말로는 그렇게 잘하는데 왜 안 써?” 하고 바로 글쓰기를 시켰을 것입니다. 실제로 독서교실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그런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어린이가 말한 것이 아깝기도 하고, 글쓰기가 어렵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욕심에 서두른 것이지요. 물론 만족스러운 소득이 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책 읽고 말하기’가 주는 즐거움
책을 읽고 말을 하는 데는 특별한 즐거움과 보람이 있습니다. 독서교실에서는 수업에서 이야기 나눌 책을 미리 읽고 오도록 합니다. 그밖에도 독서교실 서가에서 함께 책을 고르기도 하고 어린이의 관심과 필요에 따라 제가 권하기도 해서, 어린이는 보통 일주일에 두세 권의 책을 읽게 됩니다. 그렇게 읽은 책이 마음에 들었건, 의문이 생겼거나, 보탤 말이 있거나 하면 독서교실 문을 열자마자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 책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앞부분만 보려다가 끝까지 다 읽었어요.‘
“책에 나오는 노래 있잖아요. 가사만 있어서 제가 작곡을 해봤어요.”
“그런데 거기서 주인공이 한 말이 이해가 안 돼요.”
“둘 중에서 이게 더 재미있었어요. 이거 2권도 있으면 읽을래요.”
대개는 선 채로 아직 가방을 다 풀지도 않고 쏟아놓는 말들이라 두서없지만, 이런 말에는 생기와 솔직한 감정이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면서 마음에 들었던 장면을 찾아 설명하고, 그러다 문득 다시 읽느라 일순 조용해지기도 하고요. 혼자 보고 있기 아까울 정도로 빛나는 모습입니다. 이럴 때 글을 쓰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즐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리고, 말한 것보다 훨씬 단순한 글만 남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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