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내가 고래를 아무리 해부해보더라도 피상적인 것 이상은 알 수 없다. 고래에 대해서는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 허먼 멜빌, 『모비 딕』
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하얀 석고상을 그리라고 시킨 일이 있었다. 아니, 그 선생님은 말 같은 것을 하는 분이 아니어서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에 석고상을 들고 와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미술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한숨을 토하듯 ‘아그리파’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게 갓 태어난 것처럼 순결하고 눈부신 하얀 머리의 이름이었다. 선생님이 말없이 내어준 과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새하얀 형체를 종이 위에 그림으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날의 준비물인 스케치북과 4B 연필만을 가지고. 흰 도화지와 시커먼 연필을 가지고 어떻게 하얀 것을 그리라는 걸까. 막막했지만 흰 종이에 더듬더듬 선을 그어 형상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을 댈수록 석고상 그림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흰색을 그린다는 불가능한 과제.
수업 종이 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포함한 예순 명의 아이들이 전부 시커먼 형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저마다의 좌절감을 담은 그림 예순 장. 흰 석고상을 그린 검은 그림은 번역 불가능성의 증거다. 이게 이렇게 생겼는데, 눈에 뚜렷이 보이는데, 왜 종이에 그대로 그려지지 않나. 이게 이런 뜻인데, 너무나 빤한데, 왜 글로 옮겨지지 않나.
흰색은 모든 색이 합해진 색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이다. 일단 흰색은 색특정 파장의 빛만 흡수하는 표면에서 반사된 빛을 인식한 것이 아니고, 미술 시간에 실험한바 여러 색의 물감을 섞어 봐야 흰색을 얻을 수 없다. 색을 합할수록 어둡고 탁해질 뿐이다. 우리가 색이라고 인식하는 빛 ― 가시광선을 전부 합해야 흰빛이 된다. 흰빛 안에는 무지개를 이루는 모든 색이 다 들어 있는 셈이다. 빨간색, 노란색, 녹색, 파란색… 다만 ‘모든 색’에 흰색은 포함되지 않는다. 흰색은 색이 아니니까.
어떤 단어는 의미를 하나가 아니라 여럿 담고 있다. 빨간 의미, 노란 의미, 파란 의미… 책 제목은 일부러 둘 이상의 뜻을 담아 짓는 경우가 많다. 내 등 뒤의 책꽂이에는 Will in the World라는 스티븐 그린블랫의 셰익스피어 연구서가 꽂혀 있다. 번역본은 ‘세계를 향한 의지’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will’에 ‘의지’라는 뜻도 있지만 ‘will’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이름이기도 하니 한국어 제목에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will’의 다의성을 이용한 글을 쓰기도 했다. 소네트 135번에는 ‘will’이 수차례 되풀이된다.
Whoever hath her wish, thou hast thy Will,
And Will to boot, and Will in overplus’
More than enough am I that vex thee still,
To thy sweet will making addition thus.
Wilt thou, whose will is large and spacious,
Not once vouchsafe to hide my will in thine?
[…]
이 소네트를 점잖게 해석하고 싶어서 ‘will’을 ‘의지’라고 생각하고 읽어나가다가는 곧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달콤한 의지sweet will’? ‘크고 광대한 의지large and spacious will’? ‘내 의지를 당신의 것 안에 감춰hide my will in thine’? 사실 이 시는 성적 암시로 읽지 않기가 불가능하다. ‘will’을 육체적 욕망으로 읽으면 무척이나 노골적인 시가 된다. 게다가 이 단어가 윌리엄 자신이나 그의 신체 일부도 가리킨다고 보면 의미는 더욱 복잡해지고 점잖은 책에 인용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야해진다. 흠모하는 여인에게 자기를 제발 가져달라고 온갖 말장난과 궤변을 동원해서 애원하는 시다.
그러면 이 시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나도 시도해보긴 했지만 공개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비겁하지만 다른 사람의 번역을 빌려오자면, 피천득 시인은 소네트의 첫 행 “Whoever hath her wish, thou hast thy Will”을 “소원 성취하는 여인이 있다면, 그대는 윌意志을 구현시켰도다”라고 번역했다. ‘will’을 음역한 뒤에 괄호를 열고 한자로 ‘의지’라고 적었다. 마치 한 단어를 한글과 한자로 병기하듯이, 한자리에는 한 단어만 써야 한다는 글쓰기 원칙을 위배하지 않은 듯이, 괄호를 사용해서 시인의 이름과 ‘의지’ 두 단어를 한자리에 넣었다. 당연히 그래 봐야 충분하지 않다. 괄호와 슬래시나 기타 여러 기호를 동원해 ‘will’의 여러 뜻을 한자리에 다 담으면 어떻게 될까. 계속 붓을 더하다 보면 시커먼 석고상이 되고 말 것이다. 모든 색을 다 칠한다고 해도 모든 빛이 합해진 흰색을 표현할 수는 없다. 이 소네트의 ‘will’이라는 단어는 한 가지로 의미를 고정할 수 없는 표상의공백이다. 글 위에 뿌려진 하얀 물감 얼룩이다.
번역을 하다가 이런 단어를 맞닥뜨리면 한참 고민 끝에 이렇게 빈칸을 남겨두기도 한다.
낮 시간의 ____…
빈칸에 들어갈 단어의 원문은 ‘arrangement’였는데, 바람 피우는 상대와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그냥 무구한 약속이 아니라 비밀스럽고 떳떳하지 못한 데가 있다는 느낌을 한 스푼 정도 넣고 싶었다. 도모, 계획, 꿍꿍이, 궁리 등의 단어가 떠올랐지만 어떤 것도 딱 이거다 싶지는 않았다.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내포된 의미를 어떤 단어들로 표현하려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옮기지 못하고 왜곡하는 연필 선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면 일단 빈칸을 남겨두고 한 걸음 물러선다. 일상을 살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자리에 딱 맞는 단어가 문득 떠오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고.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무려 135장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고래 같은 책이다. 줄거리는 어린이용 그림책으로 축약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에이해브 선장이 자신의 한쪽 다리를 앗아간 거대한 흰 고래에게 복수하기 위해 흰 고래를 추적하다 마침내 최종 한판을 벌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린이 책으로 먼저 『모비 딕』을 처음 접한 사람은 원본의 두께에 당황하게 된다. 이렇게까지 길게 할 이야기인가? 그리고 한없이 곁가지를 뻗는 서술 방식에 또다시 당황한다. 이 책은 모비 딕을 뺀 다른 모든 것에 대해 광폭으로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도대체 모비 딕은 언제 나오나? 에이해브는? 에이해브는 책의 4분의 1 지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래 뼈로 만든 의족을 딛고 등장한다. 모비 딕은 135장으로 이루어진 책의 133장까지 가야 마침내 드디어 흰빛을 번뜩인다. “물줄기다! 고래가 물을 뿜고 있다! 눈 덮인 산처럼 하얀 혹이다! 모비딕이다!” 돌아버릴 지경으로 지연된 클라이맥스.
『모비 딕』은 고래를 추적하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이슈메일이라고 하는 소설의 화자가 흰 고래를 알기 위해 애쓰다가 실패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에이해브 선장의 고래 추적과는 아무 상관 없는 고래의 어원을 밝히는 데서 시작한다. 이어 고래를 언급한 온갖 문헌을 나열하고, 세 장에 걸쳐 고래 그림을 평가하고, 고래를 생물학적으로 분석하고, 화석을 통해 고래의 역사를 탐구하고, 고래의 앞날을 예측하는 등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고래를 온갖 분야에서 다각도로 설명한다. 그래놓고 이슈메일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내가 고래를 아무리 해부해보더라도 피상적인 것 이상은 알 수 없다. 고래에 대해서는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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