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간소한 글이 좋은 글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글을 난삽하게 쓰는 병이 있다. 살다 보면 불필요한 단어, 반복적인 문장, 과시적인 장식, 무의미한 전문용어 때문에 숨이 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답답한 표현들, 이를테면 메모, 기업 보고서, 업무상 서신, 계좌명세서 양식이 ‘간소화’되었음을 알리는 은행의 공지 따위를 누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보험사 직원 가운데 보험 상품의 비용과 혜택을 설명하는 소책자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이들의 장난감 상자에 있는 설명을 보고 장난감을 제대로 조립할 수 있는 엄마나 아빠가 얼마나 있을까? 사람들은 대체로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말을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잠시 후 상당한 양의 강우가 예상된다고 말하는 비행기의 기장은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문장이 너무 간소하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글쓰기의 비결은 모든 문장에서 가장 분명한 요소만 남기고 군더더기를 걷어내는 데 있다.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단어, 짧은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는 긴 단어, 이미 있는 동사와 뜻이 같은 부사, 읽는 사람이 누가 뭘 하는 것인지 모르게 만드는 수동 구문, 이런 것들은 모두 문장의 힘을 약하게 하는 불순물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불순물은 대개 교육과 지위에 비례해서 나타난다.
내가 다녔던 대학의 총장은 1960년대에 학원 소요가 한바탕 지나간 뒤 동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한 통 썼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관련이 있는 문제들에 대해 매우 상당한, 잠재적으로 폭발적인 불만의 표출을 경험해왔습니다.” 학생들이 상관도 없는 문제로 학교를 들볶았다는 말이었다. 나는 학생들의 잠재적으로 폭발적인 불만의 표출보다는 총장의 글솜씨 때문에 훨씬 더 기분이 상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2년에 등화관제 명령을 내리면서 쓴 다음 문장이 더 낫겠다.
공습 시 얼마 동안 연방 정부가 점유하고 있는 모든 연방 및 비연방 건물이 내외부의 조명으로 인해 노출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질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또 “건물 안에서 일을 계속 진행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창문에 무언가를 걸쳐두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좋은 글에는
독자를 한 문단에서 다음 문단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붙잡는 생생함이 있다.
이것은 자신을 꾸미는 기교의 문제가 아니다.
가장 명료하고 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의 문제다.
간소하게, 부디 간소하게 쓰자. 우리가 자주 듣는 이 말은 H. D. 소로가 한 말이다. 미국 작가 가운데 그만큼 자신의 말에 충실한 사람은 없었다. 『월든』Walden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 봐도 그가 마음속에 있는 것을 쉽고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숲으로 간 것은 신중하게 살기 위해서, 삶의 본질만을 마주하기 위해서, 삶의 가르침을 과연 내가 배울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죽을 때가 되어 내가 제대로 살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하면 난삽함이라곤 전혀 없는 이 부러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답은 난삽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치워버리는 것이다. 명료한 생각이 명료한 글이 된다. 하나가 없이 다른 하나는 있을 수 없다. 생각이 흐리멍덩한 사람이 훌륭한 글을 쓰기란 불가능하다. 한두 문단은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독자는 이내 길을 잃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를 다시 불러들이기 어렵다. 글 쓰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잘못은 없다.
독자라는 이 붙잡기 어려운 대상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독자는 주의를 지속하는 시간이 삼십 초 정도밖에 되지 않는 존재이다. 또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경쟁하는 많은 힘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이다. 전에는 그런 힘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신문, 잡지, 라디오, 배우자, 아이들, 애완동물 정도가 그런 경쟁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거기에 텔레비전, 비디오, DVD, CD, 게임, 인터넷, 이메일, 휴대전화, PDA, MP3 등 오락과 정보를 제공하는 온갖 전자기기들과 헬스클럽, 수영, 잔디, 그리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잠이 추가되었다. 의자에 앉아 책이나 잡지를 들고 조는 사람은 글쓴이 때문에 불필요한 수고를 너무 많이 한 사람이다.
독자가 둔하고 게을러서 생각의 연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독자가 길을 잃는 건 대개 글쓴이가 충분히 정성을 들이지 않아서이다.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문장이 너무 난삽해서 독자가 장황한 표현 속에서 헤매다 의미를 놓쳐버렸을 수도 있다. 문장 구성이 너무 조잡해서 독자가 그것을 여러 가지 뜻으로 읽어버렸을 수도 있다. 또 B라는 문장이 A라는 문장을 논리적으로 이어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글쓴이가 자기 머릿속에서는 두 문장의 연결이 명확해서 연결 고리를 밝히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다. 글쓴이가 사전을 찾아보는 수고를 하지 않아서 단어를 부정확하게 구사했을 수도 있다.
그런 장애물에 맞닥뜨린 독자들은 처음에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분명히 뭔가를 놓쳤겠거니 하고 스스로를 탓하면서 알 수 없는 문장으로 되돌아가거나, 고대 문자를 꿰맞추듯 문단 전체를 다시 읽으며 추측을 거듭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글쓴이 때문에 지쳐버린 독자는 이내 더 나은 사람을 찾아 떠나버린다.
그러니 글 쓰는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그걸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다. 또 자기가 쓴 글을 읽어보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가 제대로 말했나? 이 주제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보기에 글이 명료한가? 그렇지 않다면 어딘가 모호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명료한 작가는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정확히 어디가 모호한지 알아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누구는 명석한 머리를 타고나서 타고난 작가가 되고, 누구는 날 때부터 흐리멍덩해서 절대 잘 쓸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명료한 생각은 글 쓰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강요해야 하는 의식적인 행위다. 그것은 논리가 필요한 다른 일, 이를테면 쇼핑 목록을 작성하거나 수학 문제를 푸는 일과도 같다. 흔히들 좋은 글쓰기는 저절로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전업 작가들은 언젠가는 글을 좀 써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쾌할 때가 많다. 여기서 ‘언젠가’는 가령 보험이나 부동산 같은 힘든 본업에서 은퇴할 때를 뜻한다. 그 문제에 관한 책이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소리도 자주 듣는다. 내가 보기엔 ‘글쎄올시다’다.
글을 쓴다는 건 힘든 일이다. 명료한 문장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심지어는 세 번째까지도 적절한 문장이 나오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절망의 순간에 이 말을 꼭 기억하기를 바란다. 글쓰기가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글쓰기가 정말로 힘들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