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환한 날들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강사가 말했다. 강의실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비가 와 결석생이 생긴 탓도 있었지만 원래 수강생이 적은 수업이었다. 강의실엔 그녀까지 여섯 명이 앉아 있을 뿐이었는데, 모두 강사보다 나이가 많았다. 평생교육원에 신설된 수필 쓰기 수업을 같이 듣는 일곱 명의 수강생 중 오십대 주부 한 명 ― 일찍 결혼해 아들들이 벌써 다 장가를 갔다고 했다 ― 을 제외하면 나머지 여섯 명은 모두 그녀처럼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다. “그것도 전부 다 영감탱이들이야.” 얼마 전 그녀의 집에 찾아온 사위에서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렇게 말했을 때 사위는 무엇이 웃긴지 “장모님은 늘 재미있으세요” 하며 웃었다. 국문학을 전공했고 소설집 한 권과 산문집 한 권을 출간했다는 강사는 체구가 작았고, 거의 소녀처럼 보였다. “제가 강의를 처음 해보는데, 저를 보고 계신 분들이 대부분 어머니 아버지뻘이시니 긴장이 되네요.” 수업이 시작되던 한 달 전, 강사는 수강생이 주로 노인들인데 당혹한 듯 수업 소개를 하다가 몇 번이나 말을 더듬었다.
“오늘도 아무것도 안 쓰셨네요.”
짐을 챙겨 맨 마지막으로 강의실을 빠져나가려는데 강사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쓸 말이 안 떠올라서요.”
딸만큼 어린 강사는 그녀의 대답에 다음엔 꼭 쓸 이야기가 떠오를 거라고 말하고는 웃었다. 과연 그럴까. 그녀는 의심쩍었지만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귀찮아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뒤풀이는 또 안 가세요? 같이 가면 좋을 텐데.”
강사와 같이 강의실을 빠져나오자 건물 입구 쪽에 서 있던 수강생 무리 중 오십대 여자가 그녀에게 다가서며 말을 붙였다. 수강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근처 백반집에서 저녁을 사 먹는 듯했다.
“집에 가봐야 해요.”
“혼자 산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여자는 아쉬운 기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요.”
기다리는 게 사람은 아니지만 굳이 그걸 말할 필요는 없었다.
수필 쓰기 수업을 듣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 그녀는 솔직히 돈이 아까웠다. 강사는 그녀가 자기를 골탕 먹이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절대 아니었다. 나처럼 번듯한 어른이 대체 왜? 그런 오해를 살 바엔 강사에게 사실은 글 쓰는 일엔 눈곱만큼의 관심도 갖고 있지 않을 뿐이라고 말해주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수필 쓰기 수업이 수요일 오후 3시에 개설되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 수업을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섯 달 전에는 같은 시간대에 건강 수지침 수업이 열려 그녀는 다른 노인들과 함께 수지침과 압진봉의 사용법에 대해서 배웠다. 1년 전에는 여행 영어 회화 수업에서 ‘여기 티켓이 있습니다’ 같은 표현들을, 그보다 더 전에는 생활 인터넷 수업에서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거나 물건을 사고 승차권 같은 걸 예매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가 수요일 3시에 개설된 수업만을 듣는 건,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죽고 홀로 지켜오던 과일 가게를 체력이 부쳐 6년 전 아예 접은 이후 그녀는 자신의 일과를 아주 정교하게 짜놨다. 매일 정해진 일정대로 라디오를 들으면서 청소를 했고 ― 월요일 오전엔 화장실, 화요일엔 베란다, 수요일엔 냉장고 이런 식으로 ― 점심을 먹고 나면 또 정해진 일정에 따라 외출을 했다. 동네 슈퍼에서 할인 품목을 문자메시지로 알려주는 ― 팽이버섯 두 봉지 1,000원, 수미감자 한 봉지 2,250원, 돈앞다리 한 근 6,000원 ― 월요일 오후엔 장을 보러 갔고, 화요일엔 상가 안에 위치한 실내수영장에서 아쿠아로빅을 했다. 정해놓은 시간의 외출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 매일 밤 끓여두는 결명자차를 한 잔 마신 뒤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설거지를 하고 나면 그다음엔 천변에 나가 1만 보씩 걸었고, 집에 돌아와 매일 밤 연속극을 봤다. 잠자리에 들기 전엔 예능 방송을 봤는데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들이 나오는 퀴즈 프로그램이나 옛날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는 경연 프로그램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토요일과 일요일 중 하루는 딸과 통화를 하며 짧게 안부를 주고받았다. 전화를 거는 쪽은 주로 그녀였는데, 다섯 번 중 한 번꼴로 딸이 걸어올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혼자 산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종종 안쓰러워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남편이 죽은 이후 그녀는 변기가 막히면 배관공을 부르고, 바퀴가 나오면 슬리퍼로 죽이고, 직접 구입한 실내용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형광등의 전구를 갈아 끼우며 살아왔다. 그녀는 뭐든지 스스로 해결하며 살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다소간 자부심을 느꼈다. 혼자 집에 있으면 누군가를 뒤치다꺼리하거나 누군가로부터 귀찮은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었고, 솔직한 마음을 말했다는 이유로 ― 머리가 어떠냐고요? 돈이 아깝네요. 자르기 전이 더 나았는데 ― 뜻하지 않은 비난을 받을 일도 없었다. 솔직한 건 그녀의 천성이었지만 그것 때문인지 사람들은 종종 그녀를 대하기 어려워했다.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서툴렀는데 그건 어린 시절 그녀가 겪었던 일들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른이 다 된 나이에 돌봐야 할 동생이 주렁주렁 달린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을 때, 그녀의 오빠와 남동생은 남편에게 큰 빚을 진 사람들처럼 굴곤 했다. 맞선 자리에서 그녀가 남편에게 했던 말 ― 아, 조금 걸으면 안 될까요? 엉덩이에 종이가 나서요 ― 을 듣고는 더욱 그랬다. 그게 그렇게 고마운 일인가? 남편은 선량한 편이었지만, 그에게 필요한 건 밥을 차려 줄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마침내 찾아온 평화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평생 동안 장사를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그녀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아늑했고, 그건 평생교육원에서 돌아와 식탁 의자에 앉은 채 오후의 햇살이 거실 마룻바닥 위에 넓게 퍼져 있는 걸 보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평온하고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 햇빛 사이로 지난 몇 달간 그녀가 정성껏 가꾼 나리꽃의 꽃망울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꽃이 피었네.”
그녀가 소리 내어 말했고, 그러자 날카로운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거실 한구석에 세워둔 새장 속의 앵무새가 내는 소리였다. 배 부분이 노랗고 등과 날개가 연두색인 작은 앵무새.
“아, 시끄러워.”
그녀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매번 사라져 있길 바랐지만 그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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