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셋이 모이면 위계가 생긴다
남성연대와 남자-되기
“어쩌다 페미니즘 활동을 하게 되었나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에서 활동하며 수백 번도 더 들은 질문이다. 대개 그때그때 떠오르는 결정적인 사건들을 질문받은 상황과 질문한 사람의 기대에 맞춰 대답하려 노력한다. 이를테면 내가 페미니즘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15년 무렵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불리는 페미니즘 대중화 물결로 성차별에 눈뜬 학교 친구들의 도움 덕분이기도 하고, 미투운동과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변화의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잠자코 생각해 보면 그러한 결정적인 사건들은 내가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으나, 일상에서 페미니즘 공부와 관련 활동을 지속한 원동력은 아니었다. 그 지난한 과정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결국 내게 페미니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내게는 페미니즘이라는 언어가 필요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나와 성별이 다른 존재, 즉 여성과 가까워지기 위해 페미니즘을 공부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내 절박함은 그보다 나와 내 주변 남성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쪽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내게 페미니즘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남성과 남성문화를 설명하는 언어였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이 문장으로 여성이 단지 생물학적 성별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 부과되는 규범과 사회적 위치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남성 역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나 성기 모양으로만 정해지지는 않는다. 남성으로 태어나는 순간, 사회는 남성 개인으로 하여금 남성에게 어울리는 역할과 규범에 부응하도록 규제하며, 만약 그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면 낙인찍고 처벌을 가한다.
남성에게 부과되는 규범 중에서 가장 흔한 사례는 감정 표현, 특히 슬퍼하거나 눈물 흘리는 등의 부정적인 감정표현을 억눌러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이 마치 속담처럼 자리 잡은 현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제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것 같은 고리타분한 이 말이 여전히 남자 청소년들 사이에서 좌우명처럼 떠돌 수 있는 건, 우리의 지독한 성별고정관념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은연중에 계속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2016년 프랑스 파리사클레 대학교 연구진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실험 참가자들은 실제로는 성별에 따른 음높이의 차이가 없을 때도 더 낮은 울음소리를 남자아이의 울음소리로 추정하며, 낮은 울음소리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실험 결과는 양육자의 무의식적인 성별고정관념이 어린아이의 양육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당장 주변에서 아이들을 달래는 모습을 조금만 관찰하더라도 남자 어린이가 눈물을 그칠 때 유독 ‘씩씩하다’고 칭찬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을 대단한 악의나 성차별적인 의도가 분명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은영중의 말과 태도, 행동이 남자 어린이에게 자연스레 학습되어 감정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남성을 만든다.
남자 셋이 모이면 위계가 생긴다
감정 표현을 억누르는 것 외에도 남성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암묵적인 규범은 수없이 많다. ‘상남자’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하고, 상황에 따라 재력과 힘을 과시할 줄도 알아야 하며, 때로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에 동조해야 한다. 막상 하나하나 뜯어놓고 보면, ‘남자-되기’란 얼마나 하찮고 우스우며 실현하기 불가능한지 알 수 있다. 사실상 이 모든 ‘남자-되기’의 조건을 사시사철 철저하게 수행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남성이 심지어 유해하기까지 한 남성성을 포기하기 못하고 애써 좇을까? 성별고정관념을 답습하는 양육과 교육과정뿐 아니라 남성성을 통해 사회적 자원을 독점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등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가장 큰 동력은 바로 남성연대 내부의 위계질서다. 모든 남성이 같은 성별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이해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남성연대를 형성하고, 그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한 위계질서는 남성들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처럼 폭주하게 만든다.
나는 아직도 학창 시절 학년이 올라가거나 진학을 했을 때 새 학기 교실에 흐르던 미묘한 긴장감과 기싸움의 기억이 생생하다. 키와 몸집이 얼마나 큰지, 축구나 게임을 얼마나 잘하는지, 소위 ‘노는 형’ 같은 든든한 ‘빽’이 있는지 등을 눈대중으로 살펴보며 열심히 간을 보다가 조금씩 충돌하며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나는 ‘남자 셋이 모이면 위계가 생긴다’는 사실을 아주 이른 시절 깨닫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다양하게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이 방면에 썩 재능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 과정이 참 고단했다. 우두머리가 되지 못할 거란 것은 진작 알았다. 그것은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엄석대’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우식’ 같은 이른바 ‘알파 메일alpha male’의 몫이었다. 나는 그보다는 2인자 혹은 가능하다면 ‘쩜오’1.5인자로 불리는 자리를 탐했으나, 대체로는 변두리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쪽에 가까웠다.
변두리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다분히 치사하고 유치했다. 바로 ‘그래도 쟤보단 내가 낫지’의 ‘쟤’를 드러내고 깎아내리며 우습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의 교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남학생이 슬픔을 드러내거나, 운동을 좋아하지 않거나, 게임을 잘 못하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조금만 친절하게 굴어도 금방 “너 게이냐?”, “계집애같이 군다” 같은 혐오와 조롱의 말이 쏟아진다. ‘남자다움’이 무엇인지는 어차피 명확하지 않기에 그 모호함을 가리는 방법으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존재를 ‘남자답지 않음’으로 등치시켜 위계의 밑바닥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추악하고 위태로운 방법은 수많은 남성에게 타자를 밟고 일어서면 남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어설픈 기대를 안겨주지만, 동시에 위계의 바닥으로 떨어지면 피할 수 없는 낙인과 폭력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일으키며 그 어떤 다른 가능성도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남성성 연구의 거장 래윈 코넬Raewyn Connell은 『남성성/들』에서 이런 현상을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중심으로 그 가부장의 수혜를 나눠 받는 “공모적 남성성”, 그리고 배타적 위치에서 금기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종속적 남성성”으로 설명한다. 이 피라미드 같은 위계질서는 남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남성성을 증명하고 갈망하게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통제 방법이자, 그 자체로 ‘남자-되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안에서 남성들은 타인의 강요나 요구 없이도 어떻게든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자발적으로 남성연대에 부역한다.
남성성이라는 형벌에서 벗어나려면
페미니즘과 관련된 의제의 시위 현장마다 꼭 등장하는 이들이 있다. ‘새로운 남성’이라고 붙인 단체명에 어울리지 않게 고리타분한 혐오의 논리로 페미니즘과 여성을 탓하는 반페미니즘 단체다. 이들은 그 어떤 페미니스트보다 열심히 페미니즘 활동 현장에 등장해서 냉소와 혐오로 일관하며 페미니즘에 대한 각종 부정적인 가짜뉴스를 퍼트리는 데 최선을 다한다. 이들은 2023년 5월 17일,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 여성 7주기 추모 현장에도 나타나 아무도 그러지 않고, 또 관심조차 없음에도 자신들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지 말라며 피해자를 추모하는 이들에게 조롱과 혐오를 쏟아 냈다.
이러한 문제적 행태에 당연히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이들의 행동은 남성연대의 위계질서에서 바닥으로 떨어질까 두려운 마음을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상대를 탓하거나 오직 분노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여느 남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허세 섞인 혐오의 목소리로 페미니즘을 힐난하지만, 사실 여성들이 더 큰 힘을 가져서 더 이상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까 봐, 자신들이 밟고 일어설 대상이 사라질까 봐, 그래서 그 어설프고 위태로운 남성연대의 세계관이 무너져 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속내를 감추고 있다. 하지만 설령 이 위계질서의 정상에 오른들 그 불안이 사라질까? 도리어 소수만 오를 수 있는 그 자리에서는 언젠가 나락으로 떨어질까 봐 더 외롭고 두렵고 불안해지지는 않을까?
신화 속 시시포스의 형벌 같은 위계질서에서 벗어나 정말로 새로운 남성이 되고 싶다면 고리타분한 기존의 위계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남성성이라는 모호한 기준과 역할에 질문을 던지는 ‘신-남성성’이 필요하다. 남성연대 위계질서의 굴레에서 벗어나, 눈치 보고 경쟁하기보다는 그 시간에 서로를 보듬고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남성이 필요하다. 감정표현이 숨 쉬듯 자연스럽고, 남성성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그런 삶이 필요하다. 더 나은 남성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른 남성과의 관계가 불편하다면, 남성들 사이에서 내 모습이 어색하고 만족스럽지 않다면 주저하지 말고 변화의 물결에 함께하자. 우리에게는 이제 정말 새로운, 신-남성이 필요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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