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유해생물이란 __ 이다?
청설모를 떠올려 보자.
많은 사람이 청설모를 사랑한다. 그 야무지고 복슬복슬한 몸이 나무와 전선 위를 달리는 것을 보면서 미소 짓고, 응원한다. 모든 대학 캠퍼스는 자기네 청설모가 다른 어느 캠퍼스의 청설모보다 더 대담하다고 확신한다. 내 친구 하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트위터에 청설모 사진을 올린다. 청설모는 우리 교외와 도시의 삶을 장식해 주는 복슬복슬하고, 활달하고, 귀여운 야생동물의 상징이다.
그리고 내가 있다. 나와 망할 케빈이 있다.
망할 케빈은 동부회색청설모Sciurus carolinensis다. 우리는 그를 그냥 케빈이라고 부른다. 케빈은 우리 집 앞 우아한 단풍나무에서 산다. 통통한 몸매의 잘생긴 청설모다. 그가 우리 집 주변을 자신만만하게 돌아다닐 때면, 유난히 분주한 꼬리가 등 위로 홱 하고 젖혀진다.
케빈은 내 철천지원수다.
내가 적어도 5년 동안 조그마한 정원에서 분투하면서도 토마토를 얻지 못한 건 바로 케빈 탓이다.
나는 아무리 잘 봐줘도 형편없는 정원사다. 하지만 매번 날이 푸근해지면 낙천주의가 되살아나고, 나는 다시 시도해 본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뒷마당에 큰 화분을 늘어놓고서 절실한 희망을 담아 묘목을 심었다. 바질, 주키니호박, 고추처럼 누구나 기르는 작물들은 거의 다 시도해 봤지만, 내 마음속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토마토다. 어린 시절, 작고 조금 건조한 엄마의 텃밭에서 7월 말의 열기를 받으며 몰래 덩굴을 헤쳐 입에 쏙 넣었던 방울토마토의 기억 때문이다. 토마토는 혀끝에서 기분 좋게 터졌다. 햇볕에 잘 익어 진한 맛을 내는 토마토는 내가 여태껏 먹어 본 최고의 건강식이었다.
봄마다 나는 그 완벽한 경험을 재현하려고 나선다. 희망을 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토마토 묘목을 심는다.
여름마다 나는 망하게 되어 있다. 망할 놈의 케빈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케빈은 분명히 한 마리 이상이다. 어쩌면 케빈은 청설모 마피아의 대부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케빈은 배트맨 같은 것이어서, 여러 청설모가 저마다 다른 시점에 가면을 쓰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게는 그들 모두가 케빈이다.
케빈은 우리 집 마당의 주인이다. 나무에서 나를 보며 이래라저래라 찍찍대고, 보도에서 마주치면 위협하는 듯이 살짝 달려든다. 하지만 그가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는 내 소중한 토마토들이 열릴 무렵 벌어진다. 토마토는 희망적인 초록색으로 부풀어 오른다. 나는 매년 토마토들을 보면서 두 손 모아 성공을 기원한다. 화창한 날씨가 며칠만 더 이어지면, 저 작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들이 내 것이 되겠지. 나는 카프레제샐러드, 라따뚜이, 살사소스 같은 메뉴를 짜기 시작한다.
그리고 매년 케빈이 덮쳐 온다. 그는 예쁘고 통통한 초록색 토마토를 하나 골라서 크게 한입 문다. 그러고는 자신이 토마토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갑작스레 깨닫는다. 케빈은 완벽한 초록색 구체에 비극적인 이빨 자국을 남겨서 썩게 만들고, 그것을 내가 볼 수 있게끔 반드시 그 자리에 그대로 둔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케빈은 또 같은 짓을 한다. 그 또한 한결같은 낙천주의를 공격적으로 과시하는 것이다. 매일 저녁 새로운 토마토를 베어 물고 나서야 토마토가 별로라는 것을 기억해 내는가 보다. 케빈은 자신이 나보다 한 수 위라는 분명한 신호로, 내가 발견할 수 있게끔 희생자를 남겨 놓는다. 지난 5년 내내 케빈은 정원의 토마토를 한 알도 빼놓지 않고 모두 한 입씩 맛보았고, 그래서 나는 가게에서 산 살사소스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나는 케빈을 물리치려고 온갖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철조망으로 식물을 둘러싸 보았는데, 청설모의 손은 (그리고 방울토마토도) 보통의 철조망 구멍보다 작다. 한창 자라는 토마토에 카옌페퍼 용약을 뿌려서 놈의 자그마한 입을 화끈거리게 만들려고도 해 보았지만, 놈은 기다렸다가 늦여름 폭풍우에 용약이 씻겨 내려간 뒤에 토마토를 먹었다. 포식자가 한 마리나 세 마리쯤 있으면 놈이 못 다가오겠지 싶어서, 나는 뒷마당에서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은 길이 들었고 그중 두 마리는 실내로 들어와서 우리의 새 반려동물이 되기도 했지만, 케빈은 고양이 사료를 자기 식단에 추가할 뿐이었다.
어느 해에 나는 극단적인 선택지를 시도했다. 토마토를 심지 않은 것이다. 대신 화분과 컵에 할라페뇨고추 씨앗만 잔뜩 뿌리면서, 케빈이 내 사악한 계략에 속기를 기대했다. 놈이 매워서 경악하며 찍찍거리는 모습을 황홀하게 상상하면서, 놈의 복슬복슬한 뺨에 눈물이 흐르고 놈이 급하게 물러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사실 청설모는 울 수 없지만, 꿈은 꿔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케빈은 할라페뇨고추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나는 너무나 형편없는 정원사여서 할라페뇨고추마저도 살리지 못했다.
내 친구들은 망할 케빈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웃들도 놈을 안다. 우리는 이제 동네의 모든 청설모를 케빈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이야기를 내 무능과 청설모의 지략을 잘 보여 주는 우스운 일화로 여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유해동물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들에게 케빈은 그저 여느 설치류보다 약간 더 똑똑할 뿐인 평범한 청설모다. 케빈은 귀엽고, 복슬복슬하고, 심지어 상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케빈은 끝없는 두통거리다. 케빈 때문에 나는 스스로 무력하고 바보 같다고 느낀다. 과학깨나 안다는 사람이, 그것도 멀쩡한 어른인 내가 어떻게 청설모 한 마리를 내 토마토에서 떼어 놓지 못한단 말인가? 죽어 버린 초록색 공들 하나하나가 제 정원 하나 살리지 못하는 한심한 교외 거주자인 나를 비난하는 것 같다. 이게 다 망할 놈의 케빈 때문이다.
나는 어른 청설모의 평균 수명을 찾아보았고6년인데 그보다 2~3년 더 짧거나 길 수도 있다, 매년 올해가 놈의 마지막 해이기를 바란다. 어쩌면 올봄에는 놈이 옴에 걸릴지도 몰라. 어쩌면 놈이 내 토마토를 먹다가 배 터져 죽을지도 모르지. 또 어쩌면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비탄 총을 사게 될지도 모르고.
케빈은 내가 내 주변 환경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다. 우리가 안전한 카메라 렌즈 너머로 청설모를 관찰하거나 청설모가 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없을 때, 청설모는 사랑스러운 야생동물이다. 하지만 청설모가 대담하게도 우리 집 굴뚝에 제 집을 지을 때, 집세도 안 내고 우리 다락으로 이사해 올 때, 혹은 우리 정원을 무제한 뷔페로 이용할 때, 그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 삶에 침입하는 청설모의 존재는 동물의 성공을 알리는 지표이기도 하다. 여러 종의 청설모가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살아가고 있다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청설모나 다람쥐 무리는 ‘스커리scurry’ 또는 ‘드레이dray’라고 부른다. 주식은 원래 견과류나 씨앗이었지만, 이제는 감자튀김과 베이컨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청설모는 수직면을 머리부터 내려갈 수 있는 지구상 몇 안 되는 포유류 중 하나다. 청설모는 대부분 분산 저장가이다. 먹을 것이 적은 겨울에 대비하여 먹이를 여기저기 흩어서 묻어 둔다는 뜻이다. 청설모는 공간 기억력이 뛰어나서, 소중한 견과를 묻은 지 몇 달이 지난 뒤에도 그 장소를 정확하게 짚어 낸다. 나는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휴대폰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정한다. 나도 청설모가 감탄스럽다.
도시의 귀염둥이일까, 교외의 골칫거리일까? 청설모는 둘 다다. 청설모의 지위는 그들이 하는 짓에 달려 있지 않다. 그들은 그저 청설모로서 최선의 삶을 살려고 애쓸 뿐이다. 청설모가 귀여운가 저주스러운가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보는 시각에 달려 있다.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청설모는 박해받는 유해동물 신세였지만, 지금은 국가의 자랑으로 거듭났다. 붉은청설모sciurus vulgaris는 스코틀랜드 숲과 골짜기의 토착종이다. 학명의 ‘불가리스’는 ‘평범하다’는 뜻이지만, 이 청설모는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붉은청설모의 비죽 솟은 귀 털과 흰 배와 복슬복슬한 꼬리는 비어트릭스 포터의 『다람쥐 넛킨 이야기』에 영감을 주었고, 전 세계수천 종류 다람쥐 봉제인형의 패턴이 되어 주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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