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산업혁명의 요람’ 슈롭셔 아이언브리지
산업혁명의 발상지 슈롭셔
아이언브리지 세계유산Ironbridge World Heritage은 잉글랜드 북동부 슈롭셔주에 있다. 슈롭셔 동쪽의 콜브룩데일, 브로즐리, 모들리, 잭필드, 콜포트를 포괄하는 너른 지역으로 주철로 만든 아이언브리지Ironbridge를 비롯해 10개의 박물관이 아이언브리지 세계유산에 포함된다. 아이언브리지가 놓인 세번강 양안은 협곡을 따라 울창한 숲 사이로 조그만 집들이 그림같이 늘어서서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그림 1. 용광로 불꽃이나 석회 연기 같은 초기 산업화 시대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버려진 용광로와 제철 공장, 도자기 공장, 타일 공장 같은 유휴산업시설은 이제 세계유산이자 박물관으로 거듭나 관광객을 맞고 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경계에 위치한 슈롭셔는 수도 런던에서 250킬로 이상 떨어져 접근성이 좋은 편이 아니다. 런던 유스턴에서 텔퍼드까지 내셔널레일을 이용해 약 3시간, 텔퍼드에서 다시 자동차로 약 30분을 달려야 이곳에 도착한다. 아이언브리지 세계유산은 관광명소는 아니다.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의 연간 국내외 관람객이 600만이 넘는 데 비해, 아이언브리지 세계유산 전체의 연간 관광객은 약 100만 명으로 텔퍼드까지 포함해도 130만 명 정도이고 90% 이상이 내국인이다. 1779년 건립된 세계 최초의 주철교 아이언브리지를 직접 보려는 소수의 역사 전문가나 단체 견학생들을 제외하면, 관광객의 절반 이상이 인근 웨스트미들랜즈주 버밍엄과 울버햄프턴에서 오는 가족 단위 방문객으로 트레킹이나 숲 체험 같은 야외 활동에 세계유산 관람을 곁들여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이언브리지 세계유산에는 항상 “산업혁명의 요람”, “산업화의 발상지”, “발명의 계곡”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하지만 영국에서 산업혁명이나 산업화를 대표하는 장소가 이곳만은 아니다. 더비셔의 더웬트 계곡이나 랭커셔의 맨체스터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다. 더웬트 계곡은 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가 설치된 최초의 공장 크롬퍼드 방적공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고, 맨체스터는 기계제 면공업 공장과 노동자 주택단지가 발달한 전형적인 면업도시이기 때문이다. 아이언브리지 산업유산의 진정한 특성은 ‘요람’과 ‘발상지’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산업혁명’과 ‘산업화’보다는 ‘최초’에 있다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경제사가 아사 브릭스Asa Briggs에 따르면, ‘산업혁명의 요람’이란 표현은 1950년대 ‘산업고고학industrial archaeology’ 개념을 창안한 아마추어 역사가 마이클 릭스Michael Rix가 콜브룩데일을 ‘요람’이라고 묘사한 데서 유래했다. ‘산업혁명의 요람 아이언브리지’라는 이미지는 탈산업화 시대가 도래하고 버려진 산업시설에 대한 관심이 일면서 비로소 탄생한 것으로, 일종의 ‘발명된 전통invented tradition’에 해당한다.
이 글에서는 우선 아이언브리지 세계유산 가운데 주철교 아이언브리지와 블리스츠힐 빅토리아 타운Blists Hill Victorian Town을 중심으로, 슈롭셔 콜브룩데일의 버려진 용광로, 탄광, 주철소, 철공장, 주택이 산업유산으로 재의미화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이 ‘산업혁명의 요람, 아이언브리지 세계유산’으로 개발되는 과정에 주목하고, 산업유산에 새롭게 접합되는 의미와 산업유산의 진본성authenticity 문제를 생각해볼 것이다.
산업폐허에서 발굴과 보존으로
아이언브리지 협곡 일대는 석탄, 점토, 철광석, 석회석 매장량이 많고 채굴이 쉬웠기 때문에 일찍이 16세기부터 광산업과 철공업이 발달했다. 이곳이 “18세기의 실리콘 밸리”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퀘이커교도 철산업가 다비 집안의 혁신 때문이었다. 에이브러햄 다비Abraham Darby 1세는 석탄 코크스를 용광로 연료로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역사적으로 철공업 기술은 목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직접체철법에서 시작해, 철광석을 용광로의 고로에서 용해해 선철pig iron을 만들고, 선철을 가열해 탄소를 제거하고 단철wrought iron을 제조하고, 나아가 강철steel을 제조하는 간접제철법의 시대로 발전했다. 용광로에서 높은 열을 내기 위해서는 다량의 목탄 투입과 강력한 송풍력이 필요했는데, 18세기 영국의 목탄제철업은 목탄과 수력 공급의 부족으로 인해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다른 산업과 가정난방용 연료에서는 석탄이 목탄을 대체해 보급되고 있던 반면, 철공업에는 석탄 도입이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다비 1세의 혁신으로 선철과 단철 제조용 연료로 석탄 코크스를 이용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철의 대량생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다비 1세는 브리스톨에서 맥아제분기, 철선, 주철주전자 제작소 사업을 일으켰던 경험을 살려, 1707년 콜브룩데일에서 유휴 용광로를 임차해 석탄코크스 제철에 성공했다. 18세기 중엽 이후 다비 1세의 석탄 코크스 제철법은 급속히 보급되었고, 목탄 용광로는 차례로 폐쇄되었다. 총 제철 생산량에서 코크스 선철의 비중은 1750년에 5%에 불과하던 것이 1791년에는 90%를 넘어섬으로써 선철 생산에서 석탄 연료로의 전환이 완성되었다.
1779년 완성되어 1781년 새해 첫날 개통된 아이언브리지는 더비가 철공업 혁신의 기념비였다. 건축가 토머스 파놀스 프리처드Thomas Farnolls Pritchard의 설계와 에이브러햄 다비 3세와 존 윌킨슨John Wilkinson의 자금력이 합쳐진 결실이 세계 최초의 주철교 아이언브리지이다. 아이언브리지는 높이 37미터, 무게 378톤에 달하고, 전통적인 목공기법을 모방해 철부품들을 조립해 완성했다. 아치 부분에는 “콜브룩데일 철로 주조했고 1779년에 세워졌다”라고 쓰여 있다.
최초의 주철교에 대한 이 지역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했고, 회화와 동전에 아이언브리지를 등장시키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윌리엄 윌리엄스William Williams의 〈아이언브리지The Iron Bridge〉1780는 아이언브리지를 주인공으로 한 풍경화다. 1792년 콜브룩데일에서 발행한 동전에도 아이언브리지가 있었다. 이 구리 동전은 고용인에게 월급으로 지급됐던 것으로 앞면에는 아이언브리지가, 뒷면에는 1789년 완공된 케틀리Ketley 경사 수로가 새겨져 있었다.
더비가는 제철업뿐만 아니라 새로운 산업 경관을 직접 눈으로 보려는 부유한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도 수완을 발휘했다. 더비가는 회화와 조각을 적극적으로 제작해 홍보와 관광객 유치에 힘썼다. 지금의 슈롭셔는 잉글랜드 북동부의 외진 지역이지만, 18세기 말에는 런던, 북웨일스, 아일랜드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관광객들은 아이언브리지와 타르 터널, 경사 수로와 협곡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윌리엄 윌리엄스의 〈콜브룩데일의 오후 풍경An Afternoon View of Coalbrookdale〉1777이나 필립 제임스 드 루더버그Philip James de Loutherbourg의 〈밤의 콜브룩데일 풍경Coalbrookdale at Noght〉1801은 이 지역의 산업 경관을 묘사한 그림들이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이 되면 이미 철산업의 중심지는 사우스웨일스 블래나번과 웨스트웨일스로 이동했고, 아이언브리지 협곡의 철산업은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철산업과 석탄업이 사라진 자리에는 도자기·벽돌·타일 공장이 들어섰다. 주거용 벽돌과 지붕 타일, 장식용 도자기 타일, 도기 담배 파이프 공장이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하지만 도자기 산업은 폐기물이 다량 발생하는 탓에 협곡의 경관과 명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 2차 대전 이후에는 도자기, 벽돌, 타일 산업마저 쇠락해 실업이 만연한 탓에 벗어나길 갈망하는 시골이 되고 말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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