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시작하며
임박한 디스토피아,
아파도 병원 못 가는 세상
2024년,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정부와 의사단체의 힘겨루기에 볼모로 잡혔다. 한국 의료는 언제부터 이렇게 미운 오리 새끼가 되었을까? 도대체 이 사태의 본질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한국 의료를 역사적·사회적으로 살펴본 필자들은 안타깝게도 현 의료체계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정부가 의료의 공공성을 방치한 결과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비급여진료가 증가했고, 정부는 증상만 보고 원인은 놓아둔 채 의사 증원만 하면 된다고 처방을 내렸다. 하지만 시민 참여의 결여와 공공의료 부족이라는 근본 원인을 도외시하는 이러한 처방은 오히려 상업화된 의료를 더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코로나19 범유행pandemic을 거치면서 시민들 사이에서 공공병원의 필요성이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동안 공공병원의 필요성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도 “그래 맞아, 공공의료가 필요해!”라고 하면서 그 필요성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공공의료가 한국 사회에서 가능하겠어?’라는 부정적 인식이 퍼져갔다. 필요성보다는 가능성이 문제가 되고, 언론에서도 수도권 원정의료나 응급실 뺑뺑이 등 분절적인 의료 문제만 쟁점이 되면서 공공의료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2024년 2월 윤석열 정부가 큰 폭의 의대 정원 증원을 발표하자 전공의들이 집단파업에 돌입했고,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공공의료기관을 동원하고 공공의료 부문에 종사하는 의사들에게 임무를 맡기도 있다. 사실 전공의들의 파업만으로 의료공백 사태가 확대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공공의료의 부재 때문이다. 코로나19 범유행과 전공의들의 집단행동 등에서 드러난 한국사회의 공공의료 부재 문제는 의료재난과 밀착되어 우리의 현실에 다가와 있다.
앞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근래 발생한 몇몇 사건들을 상기해 보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코로나19 범유행 시기를 겪으면서 믿었던 의료안전망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확진자가 속출하던 혼란한 상황 속에서 병상을 배정받지 못한 환자들이 대기 중 사망하는 아슬아슬하고 안타까운 사건들이 즐비했다. 코로나19에 걸린 중환자가 입원할 병상이 없어 대형병원에 중환자 병상을 만들라는 행정명령이 내려져야 했고, 더군다나 민간병원들은 충분한 금전적 보상을 약속해야만 이를 겨우 따랐다. 공공병원이 없는 지자체에서는 관내에 환자를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환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코로나19 범유행 시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2022년 7월 말, 한국에서 가장 큰 서울아산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가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수술할 의사가 없어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전원하다 결국 사망한 사건은 어떠한가? 2022년 12월, 인천에 있는 가천대학교 길병원의 소아과병동에서는 당직을 설 의사가 부족해서 입원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길병원은 당시 권역응급센터를 운영하고 있었고 상급종합병원으로서 추가 보상도 받고 있었지만, 소아과 입원이라는 의료 본연의 필수서비스 제공에는 관심이 없었다. 2023년 5월에는 병원이 가장 많이 밀집된 서울에서 응급실을 제때 찾지 못해 5세 아동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지역의 필수의료체계가 무너지면서 소아청소년과 오픈 런은 물론이고, 서울 대형병원 앞의 환자방 문제도 이제는 한국 사회의 일상이 되고 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응급실, 분만시설은 물론이고 변변한 동네의원도 찾기 어려운 의료체계의 붕괴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얼마 전에는 경남 양산시에 있는 한 지역 민간종합병원이 인구 감소로 인해 폐업을 하고 말았다. 지방에 있는 중소규모 민간의료기관의 약화로 빚어진 지방의료체계에 대한 불신은 수도권으로의 환자 쏠림이라는 지역간 의료 불평등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런 붕괴된 의료 현실을 개선하고자 정부는 의사 수 증원이라는 대책을 발표했다. 그런데 공공의료 부문에서 의사를 교육·수련해 공공병원 등 지방에 배치하겠다는 최소한의 지방의료 활성화 전략도 없이 단지 2000명이라는 의사 수 증원 숫자만 덜렁 발표하고 말았다. 지방에서 환자를 돌볼 민간병원은 문을 닫고 있는데, 공공병원은 만들지 않고 단지 의사 수를 2000명 늘리겠다는 정부의 대책을 도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한편 한국의 경상의료비가 국내총생산GDP, 이하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10%에 이를 정도로 상승해 총의료비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의료공급과 재정 부분의 난맥상은 지금껏 한국사회를 지탱해 온 시장 중심 의료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향후 수많은 의료재난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이기도 하다. 즉 건강보험 보장성이 높지 않은 상태에서 질병치료를 위해 개인 가구에서 지출해야 할 비용이 계속 올라가 결국 가계에 심각한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건강보험 보장성은 전체 의료비 지출 가운데 건강보험에서 부담하는 비율로 흔히 측정되는데, 한국은 2020년 기준 6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이하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편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건강보험 보장성은 왜 낮은 것일까? 첫째, 외과 수술 등 필수의료 영역에서는 보장성이 낮지만, 영상의학검사 등의 영역은 보장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아서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민간병의원에서 수익이 높은 의료 영역을 과도하게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미용을 목적으로 한 성형시술이나 단순 기능 개성용 관절시술, 도수치료 등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둘째, 비필수요의료 영역의 비급여진료건강보험에서 보장해 주지 않는 영역 이용이 과도하게 작용하여 이 부분의 의료시장이 지나치게 활성화한 것도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실손의료보험으로 인해 본인부담금이 없어지면서 갑자기 백내장수술 후 삽입하는 인공렌즈 비용이 비싸지고 백내장수술을 받는 환자 수가 늘어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또 급여진료와 비급여진료를 동시에 받는 혼합진료로 인해 의료 이용이 과도하게 늘어나는 것도 그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이는 수익에 대한 의존성이 높은 민간의료시장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시민의 목소리도 미흡하고, 의사들도 이런 상업적 의료에 대해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지나친 민간의료공급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이에 대항할 수 있는 공공의료공급체계를 만들어 내기가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더구나 공공병원이 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공공병원도 규모와 진료 기능이 미흡해서, 코로나19 범유행 시기 앞장서 신종감염병 환자를 맡았던 것이나 간호간병통합서비스의 선도적 도입을 추진했던 것 같은 적극적인 방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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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재난’이라는 용어는 지금까지 학술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개념이다. 재난은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으로 구분되는데, 이 개념 정의에서 유추해 보면 의료재난은 ‘(일단 재난이 발생했을 때) 더 이상의 인체 피해와 합병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땅히 작동해야 할 의료안전망의 부재와 그로 인한 혼란으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적 사회재난’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필자들은 지금의 한국 의료 현실을 ‘의료재난’으로 정의하고, 도대체 왜 이런 사회재난이 생겼으며 앞으로 이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의료재난은 왜 생기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명확히 분석하고 그 해결방안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의료재난은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부족에서 기인한다. 한편 공공성 부족은 상업성의 만연으로 드러나고 있다. 다시 말해 의료기관의 수익 추구 활동이 공익 추구 활동을 앞서기 때문에 공공의료 분야가 위축되고 수많은 문제가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공공의료는 ○재난 대비 의료, ○지역 완결 필수의료, ○질병 예방과 주민 건강증진에 앞장서는 예방의료,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표준진료 모델 창출, ○취약지역 및 취약계층 진료, ○장애가 있는 시민,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노숙자 등에 대한 인권진료, ○환경 및 사회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의료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공공의료는 지역주민 스스로 모두의 의료 편익을 향상하기 위해 의견을 내고, 바람직한 의료공급을 위해 공공의료기관 운영에 참여하여 실제 건강한 생활 및 의료 이용 실천에 앞장서는 의료로도 정의할 수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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