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에 솟구친
불꽃처럼
오래전 나는 부산 영도의 작은 아파트에서 두서너 해를 살았다. 산 중턱에 지은 아파트의 베란다로 나가면 먼바다에 뜬 컨테이너선과 유조선, 여객선들이 게으른 풍뎅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인 아내는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출근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내가 차린 부실한 아침밥을 먹고 학교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학교로 가버리면 당시 별다른 직업 없이 어슬렁거리던 나는 혼자가 되었다. 왜 두 사람은 학교로 갔을까? 나는 완벽하지는 않아도 나만의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세상에는 이미 정밀하게 설계한 완전한 질서가 있다는 것, 누구든 이 질서를 망쳐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 내가 학교에서 배운 교훈이었다. 아마도 아내와 아들은 이것을 배우거나 가르치기 위해 학교에 갔을 것이다. 내 이런 상념의 가부에 상관없이 여덟 살 아들은 이 질서에 순응하면서, 때로는 반항과 모험을 시도하며 건강하게 자랐다.
반면, 당시 삼십 대 중반이었던 나는 사회 질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밤의 몽상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고 낮의 우울은 간헐적인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이 평범한 질병을 숨긴 채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큰 실수를 저지르지도 대단한 업적을 달성하지도 못한, 그저 그런 시시한 삶이었다. 삶이 시시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주위로부터 숨기려 한다. 나는 스스럼없이 타인들에게 내 삶을 숨겼고 그들은 내 삶의 대수롭지 않은 외양을 보며 만족했다. 그러던 중 내가 문학상을 받고 작가가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아주 조금 놀랐다. 아마 가장 놀란 사람은 나였을 것이다. 작가가 된다는 건 그런 일이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산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기를 보낸 탓에 나는 이 도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전국 여러 도시에서 살았고, 잠깐이지만 헝가리에서 단기 체류한 적도 있었다. 결혼 직후에는 5년 동안 캐나다의 서부와 동부 두 도시에서 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되돌아오자 열아홉 해나 살았던 도시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터를 잡은 영도가 특히 그랬다. 한국전쟁의 여파로 전국의 피난민이 몰려와 살게 되었다는 이 작은 섬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는 거의 없었다. 이사를 하고서도 꽤 오랫동안 나는 마치 이방인처럼 거리를 기웃거렸다.
어린 시절 영도와 관련한 작은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열여덟 살에 나는 영도에 산다는 동갑내기 여자아이와 시내 거리를 걷게 되었다. 처음 보는 아이였고 이름도 서로 묻지 않았다. 함께 있었던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용두산 공원 아래 남포동에서 국제시장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거리였던 것 같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모처의 다방에서 만난 것 같기도 하고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것 같기도 한데 확실치는 않다. 그 아이는 얼굴이 예쁘거나 인기가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그런 아이가 나와 함께 한 시간 가까이 있어 줄 까닭이 없으니, 그건 아마 정확할 것이다. 빨간 잠바에 유행하던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몸에 꽉 끼는 청바지를 입은 건 어렴풋이 기억난다. 웃을 때 귀여운 표정과는 달리 말씨는 거칠었다.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며 영도에 산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내게 조금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여자에게 두려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단지 영도에 산다고 말했을 뿐인데 마음이 그렇게 반응한 것이다. 어쩌면 당시에 영도는 내게 다다를 수 없는 세계의 저편을 의미했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주변의 부산 출신 분들에게 물어보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곳, 거친 위험이 도사린 세계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다. 열여덟 살에 나를 둘러싼 지리적 경계는 그처럼 좁았다. 당시 십 대였던 나는 세월이 훌쩍 흘러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영도의 한 작은 아파트에서 살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마 그랬더라면 그 여자아이를 그처럼 경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친절하게 대해주고 가벼운 농담을 건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는 혼잡한 거리 어느 지점에서 급하게 헤어졌다.
그녀가 한 마지막 말은 비교적 생생히 기억난다. 성질이 드세고 바지 호주머니에 항상 칼을 가지고 다니는 남자 친구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이 발각되면 무척 곤란해질 거라는 말이었다. 그녀가 떠나가면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을까?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영국의 사실주의 화가 루시언 프로이드Lucian Michael Freud는 젊은 시절 수상하고 위험한 친구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그들은 대체로 마약과 범죄에 연루되어 있었다. 이런 어두운 세계는 발자크나 디킨스와 같은 작가들이 호기심을 내보일 만한 거친 지하 세계이다. 당시 이십 대 청년 화가였던 프로이드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이웃에 사는 한 소년의 초상을 그렸다. 제목은 「담배 피우는 소년Boy Smoking」이다. 프로이드의 인물화는 대부분 근사하지만 나는 특히 이 소품에 마음이 끌렸다. 창백한 피부와 크고 푸른 눈동자, 넓은 코와 두툼한 입술, 입술 가장자리에 물고 있는 담배 등을 보고 있으면 천천히 그림 속으로 빨려들게 된다. 청년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어느 곳에도 이르지 못하고 머릿속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보에서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영도에 산다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불쑥 떠올렸다. 빨간 잠바를 입고서 단발머리를 찰랑이던 그녀는 운동화 밑창으로 담뱃불을 밟아 끄며 내게 물었다. “너, 우리 오빠를 감당할 수 있겠어?” 그녀는 나를 흘깃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화가들은 세계를 재현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루시언 프로이드도 그런 예술가다. 대상을 묘사한 회화에서는 이야기와 내러티브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나는 미술관에 가면 종종 그림보다는 그 이면에 숨어 있을 법한 가상의 이야기를 상상한다. 그래야 그림의 이미지가 제대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화가와 소설가는 각기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지만 결국 같은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쪽은 이미지를 재현하고 다른 한쪽은 이야기를 구축한다. 그리고 이 기능적 역할 분담은 순환한다. 루시언 프로이드는 토머스 하디의 지루한 소설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나는 이 인터뷰 기사를 읽고서 내가 왜 그의 그림을 본 직후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여자아이의 얼굴을 갑자기 떠올렸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2010년 공쿠르상을 받은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는 루시언 프로이드와 같은 성공한 예술가의 일생을 다룬 소설이다. 나는 영도를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은 다가올 나의 십 년을 지배할 소설이 되었다. 십대에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이십 대에는 E. H 카의 《미하일 바쿠닌》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슬슬 중년 아저씨가 되어갈 즈음에 발견한 책이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였다. 왜 좋은지는 논리적으로 잘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어느 페이지를 펼쳐서 읽어도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로 대신할 수는 있다. 하루키가 언급한 소설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이다. 나에게는 《지도와 영토》가 그런 책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