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하지 못해도 ‘인간’이면 충분하다
렘브란트 판 레인
Rembrandt van Rijn, 1606~1669
내 침묵의 파트너, 내 침묵의 위로
“그 나이에 전공을 바꾸면 공부도 못하고, 한다고 해도 아무 것도 되지 않아.” 서른 살이 넘어 러시아에서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던 내가 들었던 말이다. 들어둬도 쓸데없는 슬픈 조언이었다. 전공을 바꾸는 바람에 러시아어를 새로 배워야 했으니, 공부를 마칠 때면 나는 아무 쓸모없는 늙다리 석사가 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슴에 꽂히는 아픈 말이었지만, 당시 나는 꼭 ‘무엇’이 되기보다, 그냥 ‘나 자신’이 되고 싶었다. 다만 그 길을 좀 늦게 발견한 것뿐이었다. 아무 희망이나 기대도 없이, 또 어떤 도움도 없이 미술사 공부를 무모하게 해나가던 그 시절, 그 겨울 추위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해준 것 중 하나가 렘브란트였다.
방학 때마다 찾아가서 만나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미술관의 〈의자에 앉아 있는 나이 든 여인〉1654과 〈돌아온 탕아〉1669는 늘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조용한 침묵 속에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여인. 많은 말이 맴돌지만,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그녀는 차라리 침묵을 선택했다. 미술사 공부는 재미있었지만, 그 결과가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나 자신에게도 장밋빛은커녕 희미한 빛도 던져주지 못했기에, 나도 침묵했다. 그러니까 렘브란트의 나이 든 여인은 내 침묵의 파트너, 내 침묵의 위로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나이 든 여인〉처럼 알려진 바 없는, 평범한 여성이 그림의 주인공이라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획기적이었다. 당시 여성들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 건 극단적인 두 경우였다. 무슨 짓을 해도 용서되는 아름다운 비너스 유형이거나 정조, 희생 등 여성들에게 부과된 미덕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당한 루크레치아 유형 같은 경우다. 1650년 이후에 렘브란트는 이 여인처럼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나이 든 여인들을 여러 점 그렸다. 이 여인들은 내세울 만한 큰일을 한 사람들이 아니다. 생의 시간을 견뎠지만, 그것뿐이었다. 대단히 자랑할 것 없는 그냥 그런 사람들. 그렇다고 그 삶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로 행복했고, 때로 슬펐으리라. 이 여인은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저 내면으로 깊게 침잠해서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잔잔한 기쁨, 회한과 두려움 같은 여러 감정들 속에서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잘게 부서져 쌓여 있다. 누가 가서 휘젓는다면 이야기들이 비로소 피어오르리라. 렘브란트가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은 영웅들의 대단한 스토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낮은 소리다. 이 낮고 작은 이야기가 들리도록 마법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렘브란트의 놀라운 빛이다. 창문이나 촛불 같은 설정이 없으니, 그림 속 빛의 기원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빛은 인물 자체에서 조용히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어두울 때에만 비로소 보이는 약한 빛. 그런 미약한 존재들의 나직한 언어들이 그림 속에서 조용히 울려 펴진다.
인간적이라면 충분히 아름답다
그런 점에서 렘브란트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바꾸었다. 그는 인간이라면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새로운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렘브란트가 그렸던 젊은 시절의 기이한 표정의 자화상들과 앞서 언급한 나이 든 여인과 같은 노인을 그린 그림들을 ‘트로니’Tronie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트로니는 원래 ‘얼굴’이라는 뜻이었는데, 후에 “얼굴의 뚜렷한 특징과 감정을 드러내면서 색다른 의상을 입은 인물의 상반신 그림”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트로니는 대형 유화를 그리기 위해 인물의 표정과 빛의 효과를 연구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트로니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에게 트로니는 인간에 대한 기존의 통념과는 다른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탈리아의 화가들 역시 눈앞의 모델들을 보고 그렸지만, 그들은 되도록 모델을 이상화시켜서 시간을 초월한 인간상에 근접시키려 했다. 그 결과 그림 속 인물들은 대부분 젊고 완벽해졌다. 그러나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인간에 접근해갈수록, 우리는 그 인물의 개성에 주목하게 된다. 개성의 강화는 결국 보편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불완전함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사실 어떤 인간에게도 ‘완벽함’이란 없다. 다만 ‘다름’이 있을 뿐이다. 개인의 초상화가 그려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도 바로 그 ‘다름’ 때문이다. 한 개인도 어떤 때는 뜨겁고 어떤 때는 차가우니, 그때그때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영원한, 완벽한 것은 없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순간에만 존재하는 불완전뿐이다. 렘브란트는 불완전한 인간 그대로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렘브란트의 그림 속 인간은 고전주의 미술이 꿈꾸는 ‘영원한 무표정’을 한 젊은이에서 벗어나 풍부한 표정을 가진 노인들이 되었다.
사실 젊은이들의 표정은 다채롭지만, 노인들의 표정은 비슷비슷하다. 웃는 것도 우는 것 같고, 우는 것도 웃는 것 같다. 이미 만들어진 세월의 주름이 표정이 만드는 주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렘브란트에게는 맨질맨질한 젊은이의 얼굴보다 지금까지의 삶의 모든 여정이 지도처럼 드러난 주름진 얼굴과 거친 손등이 더 매력 있는 회화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렘브란트에게서 노인의 얼굴은 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으로 풍부한 회화적 질감을 얻게 되었다. 임파스토 기법으로 그린 그림은 가까이서 보면 혼란스럽게 물감 덩어리를 더덕더덕 발라 놓은 것 같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풍부한 입체감 덕분에 그림 속 인물의 호흡까지 전해질 만큼 생생한 느낌을 준다.
삶의 의미도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나이 든 사람의 얼굴은 이미 하나의 역사처럼 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렘브란트가 그린 노인들은 자신이 살아온 궤적을 과시하며 훈계하려고 나선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회한의 감정으로 되돌아보며 조용히 내면으로 침잠해서 삶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인물이다. 사실 ‘나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가장 치열하게 얻고 싶었던 사람이 렘브란트 자신이었다. 그렇게 말년의 렘브란트는 다양한 표정의 자화상을 시도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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