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23년 8월 3일, 스위스 페피콘.
“이제 약 먹어도 되나?”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은 엄마가 묻는다. 식당에 갔을 때, 후식은 언제 나오나? 하고 묻는 것과 같은 온도로. 불안도 초조함도 없다. 엄마는 스위스에 도착한 순간부터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
아이린은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구토억제제를 마신 뒤 30분은 지나야 약을 마실 수 있다.
“Clouds look at me.”
엄마가 침대 맞은편 창으로 보이는 하얀 구름을 가리킨다. 완벽한 하늘과 완벽한 구름이 거기 있다. 엄마는 구름을 타고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아빠와 엄마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아이린이 약이 준비되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덧붙였다. 지금 마셔도 되고 원하는 만큼 시간을 가져도 됩니다.
“Now.”
엄마는 단호하게 말한다. 아이린이 약병을 따고 투명한 컵에 내용물을 붓는다. 점성이 있는 투명한 액체다. 약을 건네자 엄마가 받아 든다. 조금의 떨림이나 망설임도 없이 약을 마신다. 단숨에.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은 염원이 전해진다.
타냐가 초콜릿을 잘라준다. 엄마가 초콜릿을 먹는다. 라즈베리주스는 마시지 않고 작은 초콜릿 조각을 하나 더 받아 반으로 자르려 한다. 옆에 있던 타냐가 도와준다. 엄마는 새끼손톱만 한 초콜릿 조각을 입에 머금고 아이린과 함께 심호흡한다.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한 번의 심호흡을 한 뒤 침대 등받이에 기댄다. 나는 엄마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는다.
“Hot.”
엄마가 말한다.
“더워?”
“아니, 몸이 뜨거워.”
아이린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한다. 곧이어 엄마가 “dizzy”라고 한다.
“어지러워?”
엄마의 눈이 감긴다. 엄마가 잠들었다. 아이린과 티냐가 놀란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약을 먹고 편안한 잠에 빠질 때까지는 5분에서 10분 정도 걸린다고. 엄마는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잠든 것이다.
아이린이 침대 등받이를 내린다. 그리고 내게 속삭인다. 이제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아요.
아이린의 말대로 엄마는 편안한 표정이다. 잠을 잘 때조차 미간에 새겨져 있던 고통이 사라지고 없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는다. 아직 맥이 뛴다. 숨죽이고 엄마를 바라본다. 엄마가 떠나는 지금을,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 눈물이 나지만 눈이 빠질 만큼 쏟아지진 않는다. 엄마가 내 곁을 완전히 떠났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기쁘다.
약해지던 맥이 멈췄다. 스위스 시간으로 12시 반,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7시 반이다.
엄마, 안녕.
나는 엄마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방 안을 차근차근 둘러본다. 그렇게 하면 엄마의 영혼을 찾을 수 있다는 듯이.
여덟 장의 사진
이 글의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이름: 조순복趙順福
생년월일: 1944년 12월 19일음, 원숭이띠
출생: 함경도
본관: 한양 조씨
가족: 배우자, 슬하 1남 1녀
여기까지 적다가 이런 딱딱한 정보로는 결코 엄마를 알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엄마를 소개하기로 했다. 여덟 장의 사진을 보면서.
첫 번째 사진
흑백사진 속 엄마는 교복을 입고 있다. 단발에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 핀을 꽂았다. 엄마는 열 살 터울의 이모를 안고 있다. 색동 한복을 입은 꼬마 이모는 입을 앙다물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이모가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니까 엄마는 중학생일 것이다.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엄마의 아랫입술이 도톰하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입술은 얇은 편이었다. 나이가 들면 입술 크기가 줄어든다더니 정말인가?
나는 잠깐 거울을 본다. 내 입술이 예전보다 얇아진 듯한 느낌이 든다.
엄마가 열여섯 살에 찍은 사진이라면 1960년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64년 전.
나는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상상한다.
새하얀 깃이 달린 검은 교복을 입고, 힘찬 걸음으로 온양을 누비던 소녀.
소녀는 누구보다 큰 소리로 웃는다. 웃을 때면 목젖까지 보인다. 웃음은 금세 주변 사람에게도 전염된다. 명랑하고 활발한 성격이지만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많다. 소녀의 엄마는 시장에 갈 때 딸 다섯 가운데 소녀만 몰래 불러 데려간다. 장을 보고 오는 길에 뜨끈한 고깃국밥을 사 먹인다. 자매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소녀는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타지에 가서 아플까 봐 걱정이라 보내줄 수 없다고 했지만 반에서 단 한 명, 자기만 가지 못하는 것이 섭섭하다.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사다 준 석가탑 모형을 손에 쥐고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다짐한다. 나중에 커서 여행을 많이 다니겠다고. 석가탑뿐만 아니라 에펠탑도 자기 두 눈으로 볼 거라고.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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