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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사실은 다릅니다
“언니, 요즘 방콕이 그렇게 핫하대!”
“그래? 그러면 다음에는 방콕으로 가자!”
친한 동생과 함께 금요일 저녁 2박 4일의 짧은 일정으로 홍콩 여행을 가며 비행기 안에서 나눈 대화였다. 그때는 몰랐다. 내 캐리어가 나보다 먼저 핫한 방콕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는 걸. 새벽 2시에 홍콩 공항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짐가방이 나오지 않았다. 동생이 물었다. 동생이 물었다.
“혹시 또 천수이가 천수이 하는 거 아냐?”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가만히 있어도 재수 없는 애’로 통한다. ‘수이하다’는 말은 ‘어이없는 일이 자꾸 일어난다’는 뜻으로 쓰이곤 했다. 일단 나는 새들의 공격을 자주 받는다. 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가다가 난데없이 비둘기 똥을 맞질 않나, 친구 결혼식 날 부케를 받겠다고 샵에 가서 헤어 메이크업을 하고는 식장 입구에서 비둘기 똥을 맞은 일도 있었다. 내 가르마가 하늘에서 보면 화장실 표시로 보이는 걸까?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앞에서는 까마귀 똥을 맞는 바람에, 남들은 ‘루이비통’ 사러 프랑스에 간다는데 나는 ‘루브르똥’ 했다며 또 하나의 수이한(?) 기억을 만들기도 했다.
새만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그렇게 소매치기를 조심했는데 정작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공항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누가 내 캐리어를 들고 가 버리기도 했고, 해외에서 여권을 소매치기당해 긴급 여권을 받아 귀국한 일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여행 중에 어느 정도 사건 사고가 생기는 건 각오하는 편이지만, 그날처럼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가방이 없어지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정말 수이하게도 가방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귀국하는 날 인천공항에서 수하물을 인도받았다. 가방은 제때 못 받았어도 사과와 보상은 제대로 받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100불의 보상 제안과 “돈 주면 사과지 무슨 사과가 더 필요하냐”라는 말이었다. 유사한 피해 사례가 더 있을 것 같아 검색을 해 봤다. 항공사 측에서 제시한 보상금에 불만이 있으면 소송으로 가야 하는데, 소송에는 비용과 시간이 든다. 그래서 항공사가 일방적으로 제시한 금액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거나, 아예 보상받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런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셀프 소송을 하기로 했다.
차근차근 증거를 모으고 사건을 정리했다. 항공사에서 셀프 수하물 수속 기기의 오류 발생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사고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나 장치도 마련하지 않은 점, 수하물이 방콕으로 간 것을 그다음 날 아침에 바로 확인하고도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야 찾을 수 있게 한 점, 사과도 없이 본인들의 내부 규정만 내세우며 보상 금액 100불을 제시한 점 등을 문제로 지적하고, 이로 인해 나에게 발생한 적극적 손해 34만 8109원 및 위자료 100만 원을 청구했다. 소장 말미에는 아래와 같이 소송의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변호사인 원고는 저와 같이 여행을 망치고도 어떠한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본인이 입은 피해만큼의 보상도 받지 못하는 승객들이 없도록 소장을 공개합니다. 이러한 피해를 입는 분들이 변호사 없이도 소액이나마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하고자, 원고가 변호사이기에 변호사 비용을 들이지 않고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이점을 살려 이번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피고 측은 운이 없어 하필 변호사의 수하물에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미 지적되어 개선되었어야 할 일이 발생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총 2년간 소송을 진행하며 서면 122장, 증거 15개, 첨부 자료 11개를 제출했다. 피고 항공사와 보조 참가인 공항 공사 측도 변호사를 선임하여 맞대응했다.
그 2년의 시간 동안, 하루는 증거가 이렇게 많은데 당연히 내가 승소하겠지 생각하다가도, 다음날이 되면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을까 봐 불안감에 시달렸다. 사실과 진실은 가끔 다를 수 있다. 아무리 진실이라도 재판에서 설득해 내지 못하면 그것은 사실이 될 수 없다. 진실이 윤리의 영역이라면, 사실은 논리의 영역이다. 진실은 사실보다 힘이 없다. 재판은 나만 떳떳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많은 사람이 자신이 진실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진실이 밝혀지지 못할까 봐 재판을 두려워한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했다.
“피고는 원고에게 74만 3675원 및 이에 대해 2018년 10월 27일부터 2019년 12월 3일까지는 연 5퍼센트, 그다음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2퍼센트의 비율로 각각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2018년 10월에 시작된 소송은 2019년 12월 1심을 거쳐 2020년 10월 항소심 선고를 끝으로 이렇게 마무리됐다. 대개 정신적 손해배상은 많이 인정되지 않는데, 그래도 청구한 100만 원 중 50만 원이 인정됐다. 친구들은 그렇게 많은 서면을 내어 싸우는 내 정신 상태를 보고 판사님이 가엽게 여기신 것 같다고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승객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항공사 수하물표에 그동안 없었던 안내 문구와 목적지 한글 표기가 생겼고, 추가적인 안내 표시판 등도 설치되었다. 진작 개선되었어야 할 부분들이 실행되는 걸 보면서 내가 불안에 떨었던 시간이 그리 헛된 것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동안 나는 의뢰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일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원고가 되어 법정에 서 보니, 그렇게 수없이 법정을 드나들었음에도 이 사건만 생각하면 몹시 긴장되고 불안했다. 직장에 양해를 구해 시간을 내고, 경우에 따라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는 큰 비용을 지출하면서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를 기다리는 의뢰인의 심정이 변호사가 느끼는 사건에 대한 부담과 압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송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 과정에서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먼저다. 변호사로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예전엔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나도 안다”라며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나도 알아도, 판사님이 모르면 그건 모르는 거예요”라고 쉽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진실이 사실과 다르다면 그 진실을 판사에게 알리려고 변호사가 있고, 억울한 사람에게는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죄 지은 사람은 딱 지은 죄만큼 벌을 받도록 하려고 변호사가 있다. 그런데도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의뢰인만 탓했다. 이제는 증거가 없어 밝혀지지 못한 진실도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나라도 먼저 믿어 주기로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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