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불사연구소
“나, 아무래도 스토킹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
라고 선배 언니가 털어놓은 것은 두 달 전, 기념식 준비가 한창이던 무렵이었다. 사연인즉슨 웬 남자가 연구소로 전화해서 자기는 아무개라고 하는 사람인데 언니와 동향 출신이라 무척 친한 사이이고 국회의원 후보라면서 언니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똑똑한 접수처 직원은 ‘무척 친한 사이’라면서 휴대전화 번호도 모르는 것부터가 수상쩍은 데다 난데없이 국회의원 후보를 들먹이며 사기성이 다분히 짙어 보이는 공약까지 읊어대자 ‘지금 자리에 안 계시고 휴대전화 번호 같은 개인정보는 본인 허락 없이 알려드리기 곤란하다’는 말로 딱 막아버렸다. 그래도 예의상 전하실 말씀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다시 걸겠다고 했는데 그 말만은 진담이라서 지금 수시로 ‘나중에 다시 걸어’ 언니의 거취를 묻는 통에 접수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는 것이다. 뭐 평소 같으면 사실 마비될 업무 자체가 별로 없고 한가하고 태평하기 그지없는 곳이 이 연구소, 그중에서도 특히 접수처이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까 모두들 행사 준비로 바쁜데 모처럼 해야 될 업무라는 것이 있을 때 하필 이런 종류의 귀찮기 짝이 없는 전화가 끈질기게 걸려오면 곤란하단 말이지.
우리 연구소가 뭐 하는 곳이냐 하면 이름 그대로 영생불사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곳이다. 한일강제병합 얼마 후인 1912년에 “일제가 망해도 우리만은 영생불사”라는, 일말의 진실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유치찬란해 보이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설립되고 올해 98주년을 맞이한 관계로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르게 되었다. 어째서 90년도 95주년도 100주년도 아닌 98주년이라는 애매모호한 숫자에 맞추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고 선배들도 모르고 아마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한 이사님들도 잘 모르실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야 그저 기념식을 한다면 하는 줄 알고 시키는 일이나 꾸역꾸역 하는 거지 말단이 별수 있나.
말단이긴 하지만 직급이 농간을 해서 그래도 직함만은 과장인데 알고 보면 연구소 전체가 직급 뻥튀기가 돼버려서 맨 위가 이사님들이고 그 휘하에 부장이니 차장만 수두룩하니 과장인 내가 제일 막내라 내 밑으로는 일반 사원은 고사하고 대리도 한 명 없다. 게다가 연구소인데 어째서 선임 연구원이나 책임 연구원이라고 하지 않고 일반 회사처럼 이사니 과장이니 부장이니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 역시 시키면 하는 거고 명함 파 주면 받는 거지 내가 나서서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뭐 거기까지는 좋은데, 특히 월급 받을 때 좋은데, 문제는 일반 사원이 하나도 없으니까 사원급에서 할 만한 온갖 잡일이 이름만은 과장이고 사실상 말단인 나한테 떨어진다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진 첫 번째 잡일이 뭐였냐 하면 영화배우 ㅂ씨를 섭외해 오는 것이었다.
이 영화배우 ㅂ씨는 누구냐 하면 사실은 얼굴도 잘생기고 연기도 잘해서 무슨 무슨 상도 꽤 타고 이름도 많이 알려진 사람인데 우리 연구소나 98주년하고 무슨 관계가 있냐 하면 아무 관계도 없다. 다만 까마득한 옛날에 배우로서 막 알려지기 시작하던 무렵에 불로장생에 관한 판타지영화에 출연한 적이 한 번 있다는데 영화는 흔적도 없이 쫄딱 망해서 지금은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 제목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주연 배우들에게도 아마 경력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오점으로 남아 있겠지만 어쨌든 불로장생이니까 기념식에 맨 무슨 의사니 박사니 교수라는 사람들만 오는 것보다는 영화배우 같은 유명인도 하나 껴 있는 쪽이 좀 덜 딱딱하고 연구소의 위상을 생각해서도 그럴듯해 보이지 않겠느냐는 것이 ㅂ씨를 불러오자는 취지였다.
취지는 좋았는데 이런 기획이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 나오자마자 만장일치로 통과될 리는 물론 없고 게다가 이사님들 휘하 부장님 차장님 모두 다 자기 나름대로는 영생불사 분야의 전문가이다 보니까 불로장생과 영생불사가 과연 같은 것인가 하는 개념적인 차원에서 싸움이 한번 붙었더라는 것이다. 불로장생은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고 영생불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인데 ‘오래’와 ‘영원히’는 과연 같은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당연히 ‘영원히’가 ‘오래’보다 훨씬 오래 지속된다. 그러므로 불로장생은 영생불사보다 저급하며 그러므로 저급한 불로장생 따위를 다룬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를 관계자 자격으로 이렇게 중요한 행사에 불러올 수는 없다는 것이 반대파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개념적으로 충실하여 엄격하게 ‘영생불사’만을 다룬 영화를 찾아봤더니 우리나라에선 찾기 힘들고 다 미국 영화밖에 없는데 할리우드에 연락해서 휴 잭맨 같은 사람을 부른다고 그 사람이 영생불사 연구소 98주년 같은 걸 기념해서 한국까지 와줄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휴 잭맨이 출연한 영화가 과연 영생불사에 대한 영화인지 환생에 대한 영화인지 아니면 둘 다 아니고 평행우주에 대한 영화인지 거기에 대해서도 한동안 논란이 오갔는데 이 문제를 판별하기 위해서 영화를 틀었더니 이사님들 모두 15분쯤 보다가 코 골면서 잠들어버려서 논쟁은 다분히 허무하게 일단락되었다.) 그럼 차선책으로 러시아 영화로 세 편짜린가 시리즈가 있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뭐 흥행에도 대단히 성공하고 도저히 발음할 수 없는 이름의 큰 상도 받았다지만 연구소에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 제안도 역시 물 건너가버렸다.
그리하여 영화배우 ㅂ씨다. 차장님도 아니고 부장님도 아니고 심지어 이사님도 아니고 무려 소장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호출을 하시는 바람에 잔뜩 쫄아서 달달 떨면서 찾아갔더니 포스트잇에 대충 적은 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불쑥 내밀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런 유명 영화배우 같은 사람은 일정이 빡빡할 테니까 미리미리 연락해서 못을 박아둬야 한다, 이미 한번 비서실에서 연락을 해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변까지 들었으니 여기 그 유명 영화배우의 매니저 연락처로 자네가 한 번 더 연락해서 확답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연락할 때 읊어야 할 대사까지 지정을 해주셨다. 가로되 모 “대형 제약회사” 부설 연구소의 아무개 ‘과장’이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98주년 기념행사에 꼭 좀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십사, 이렇게 공손하지만 확실하게 얘기를 하라는 명령이었고, 특히 ‘유명 대형 제약회사’인 본사 이름과 ‘과장’이라는 직함을 강조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래도 과장 정도 되는 사람이 전화를 했으면 어느 정도 예우는 해주고 있다는 걸 그쪽에서도 이해할 테고, 특히 대형 제약회사 이름을 거론하면 광고라도 한번 출연시켜주려니 하는 생각에 그쪽에서도 거절하진 못하리라는 설명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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