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지 않는 호수
그녀는 그 일대의 파수꾼으로 삼십삼 년을 보냈다. 누군가 그녀에게 직책을 준 것도 아닌데, 그녀는 얼어버린 땅에서 그것만이 자신의 일이라는 듯이, 파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의 반을 그곳의 파수꾼으로 보냈다.
파수꾼 이전에 그녀는 방랑자였다. 죽은 엘크의 가죽을 엮어 만든 외투와 질긴 나뭇잎을 토끼 가죽 밑에 덧대어 만든 신발이, 어딜 가나 몰아치는 매서운 눈바람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주는 전부였다. 북쪽으로 갈수록 산맥은 가팔라졌고 밤이 되면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몰아쳤지만, 한낮의 태양이 그 모든 고통을 잊게 할 만큼 따사로웠다. 햇빛이 반사된 빙하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다. 그녀는 낮이 되면 옷가지를 전부 벗고 차디찬 빙하에 누워 온몸으로 햇볕을 즐겼다. 얼어죽을 것 같은 추위 속에서도 땀에 머리카락이 달라붙고 코끝이 녹아내릴 듯한 더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경탄하면서, 그녀는 산맥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향했다. 풍경은 점점 더 황량해졌다. 세상은 머리털처럼 솟아 있는 나무와 빙하, 그뿐이었다. 그녀가 믿었던 푸른 대지는 허상이라고, 세계가 말해주고 있었다. 뼈가 조각나는 듯한 추위로.
방랑을 그만두어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전해듣기만 했던, 하지만 누구도 그런 눈보라가 실재한다고 믿지 않던, ‘횡사의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인류가 남긴 해묵은 때가 뒤엉킨 눈보라였다. 바람소리가 마치 지구의 절규처럼 들리며 한번 그 속에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방황한다고 했던가. 횡사의 눈보라가 보이면 있는 힘껏 도망치거나 바위나 나무에 자신을 묶어두라는 조언도 들었지만 다 부질없었다. 바람이 갑작스럽게 세게 불어온다고 느낀 찰나, 눈보라가 그녀를 덮쳤다. 방향감각은 물론이고, 그녀에게 단단히 박혀 있던 삶의 의지, 희망, 기대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정도의 위력이었다. 눈보라의 소리는 지구의 절규가 아니라 통쾌한 웃음처럼 느껴졌다. 얼어붙은 시대에도 햇볕을 느끼며 버텨보겠다던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가소로운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마음을 박탈당한 채 그녀가 순순히 죽음의 겹을 쌓고 있던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리 와.’
낮고, 차분하고, 따뜻하며 두려움이나 다급함 따위가 섞이지 않은 목소리. 그녀는 사후死後의 속삭임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서 저토록 차분할 수 있다니. 소리를 따라가면 죽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따라가는 것이 좋은 것인가?
‘당신, 왜 움직이지 않지? 이리 와.’
그녀는 어쩌면 이번이 죽음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짧은 고민을 한 뒤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산양 한 마리가 있었다. 행성의 지층을 떼어 만든 듯한 거대한 뿔과 수평선을 담은 듯한 눈동자, 생의 안내자 같은 얼굴을 한 산양이 횡사의 눈보라 속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산양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쉬이 따라가지 못하고 망설이자 산양이 걸음을 멈춘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리 와. 나가자.’
그녀는 산양을 따라 눈보라를 벗어났다.
산양이 그녀를 데려간 곳은 산맥의 중심이자 아주 오래전 인간들이 많이 찾았다는 도시였다. 하지만 그녀가 방랑하며 마주쳤던 도시와 같은 단어로 부르기에 이곳에는 그만큼 높고 큰 건물이 없었다. 눈에 파묻혀 삼각 지붕만 간신히 보이는 수준이었고,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앞서 걷던 산양이 멈춰 그녀에게 물었다.
‘추운가? 배가 고픈가? 졸음이 오는가?’
그녀는 그제야 산양이 말을 할 때마다 뿔 사이, 머리 가죽 밑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빛을 발견했다. 그녀는 춥고, 배도 고프고, 졸음도 온다고 대답했다. 산양은 그녀를 높은 지대에 만들어진 호텔로 안내했다. 누군가가 짧게 머물다 간 흔적이 호텔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읽을 수 없는 글자로 쓰인 책과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들, 싹을 틔우지 못한 씨앗, 짐승의 송곳니나 발톱 같은 것들이.
‘이십 년 전까지 종종 인간이 방문했지만, 혹한이 심해지면서 이곳까지 오지 못한다. 아무도 없었다. 이십 년 동안.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지?’
이유도, 목적도 없었다. 아니, 한때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눈보라가 삼킨 한 인간을 찾기 위해서였다. 행성의 틈에 끼여 누군가가 자신을 찾기를, 구조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 인간을 찾아 떠나왔으나 혹한에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한 뒤 그녀는 그런 희망을 버렸다. 이 행성에 틈은 없다. 깊은 곳 구석구석까지 추위가 스며들어 있다.
그녀는 그때부터 자신을 ‘떠도는 자’라 여겼다. 떠돌기 위해서는 목적이 없어야 했다. 한때 꿈꿨던 풀이 자라는 초원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뒤로 이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도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보이는 것만 세상이라 받아들였다. 산양은 그녀에게 가장 탁월한 적응 방식을 택한 것이라 말해주었다.
산양의 이름은 ‘폴’이다. 산양의 목소리는 성대가 아닌 머리뼈에서 나왔고, 머리뼈 아래에는 칩이 박혀 있었다. 폴의 머리에 칩을 심은 이는 삼십오 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여러 개의 칩이 있었고, 세계 곳곳을 떠돌며 동물의 머리뼈에 칩을 심어두고 다녔었다고 폴이 말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그 덕분에 폴과 대화할 수 있었다. 폴이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기에 그녀도 방랑자의 생활을 그만두었다. 폴의 동료들이 이 도시를 은신처로 삼고 있었다. 칩을 심은 산양은 폴뿐이었다.
‘이렇게 사고하는 산양은 나뿐이다. 어느 날 머리뼈에 바람이 드는 감각을 느꼈지. 실제로 머리뼈를 열어서 느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이건 중의적인 표현이야. 바람을 느낀 후로 세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전에는 내가 가야 할 길, 먹어야 할 이끼, 잠들 수 있는 어둠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내가 가지 않을 길, 이끼 옆에 핀 꽃, 한낮의 평화가 보인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다. 끊임없이, 새롭게 보이는 세상에 대해.’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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