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원서동
처음에 배운 건 수리의 종류에 관한 용어들이었다. 중수와 중창과 재건의 차이 같은 것. 면접을 끝내고 받아 온 『고건축용어사전』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 말들이었다. 면접은 친구 은혜가 소개해준 자리였다. 건축사사무소인데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를 채용하고 싶어한다고.
“내가 너 석모도 헤밍웨이라고 자랑 많이 했다. 저번에 시청이랑 일해서 낸 저서도 보내주고, 그 독수리 책.”
시에서 지원을 받아 작업한 그 책은 강화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 흰꼬리수리와 흰죽지수리에 관한 일종의 홍보자료였다. 같은 맹금류라도 그 둘은 독수리와는 다른 종이고 홍보책자 역시 내 저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은혜에게 애썼네, 하고 인사했다. 나와 여러모로 다른 은혜는 어떻게든 일은 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신조로 항상 뭔가를 추진 중이었다. 주로 사람과 사람을 엮는, 녹록지 않은 일을 맡았고 그래서 섬 친구들 사이에서도 별명이 ‘추진체’였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고 며칠 뒤에 파주에서 면접을 봤다. 면접 자리에 나온 사람은 사무소 소장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업자라고 했다. 동업자라고 해도 회사 내 무슨 직함이 있겠지 싶었는데 그런 건 없고 ‘소목수’라 부르라고 했다. 커피를 가져다준 젊은 직원도 “소목님, 여기” 하며 잔을 두고 갔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낼 때마다 왜 일반 대학이 아닌 학점은행제로 학위를 땄는가를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왔지만 그는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은혜가 보낸 책자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더니 줄곧 그 얘기만 계속했다. 특히 어린 흰죽지수리가 교동과 평야에서 다른 수리 떼와 까치, 까마귀들과 경쟁하다 산 정상을 차지하는 부분이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책자를 쓰면서 그저 관공서 유인물로 사용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누군가의 그런 소감을 듣는 일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살아 움직이는 수리는 아니지만 저희가 하는 집수리도 수리는 수리니까, 이 일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발견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그는 그 말을, 아까부터 반복하고 있는 두 팔을 활짝활짝 벌리는 과장된 제스처와 함께 했다. 나는 공사 백서를 건조하게 기록하는 일이 감동과 무슨 상관있을까 생각하면서도 감사합니다, 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목수의 방은 건축사사무소라고 하면 떠오를 만한 세련되거나 모던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저 너무 많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갖가지 것들이 쌓여 있었다. 철제로 된 선반과 진열장이 공간 대부분을 차지했고 어디서 뜯어냈는지 모를 고목재와 건축 부속품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나무 냄새는 거기서 풍기는 모양이었다.
“석모도에서, 매일 나오시는 건 아니지만 오가기 어렵지 않으실까요?”
“이제 다리가 개통돼서요. 서울은 좀 걸려도 여기까지는 한시간이면 옵니다.”
“아.”
소목수는 탄식하듯 말하더니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나는 뭐가 잘못됐나 싶어 당황했는데 “그러면 이제 예전 석모도가 아니네요.” 하는 소목수의 말이 이어졌다. 변화는 대교 공사가 시작되기 전부터도 있어왔다. 교량 건설 소문이 돌고 공사 계획과 무산이 거듭되는 동안 섬에서 그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모래 한톨도 없을 것이다. 육지와 이어진다는 사실은 기후가 바뀌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예측할 수 없는 혼란 아래 섬의 많은 것들이 생기거나 사라졌고 살거나 죽기도 했다.
“하다못해 갈매기들도 곤란하죠. 페리가 안 다니면 뱃전에서 사람들이 주는 새우깡도 못 먹으니까.”
소목수가 내 말에 동의하면서 갈매기들도 재취업이 필요해졌네요, 하고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는 백서 작업을 하는 곳이 어디냐고 말을 돌렸다.
“창덕궁이랑 같이 있는 창경궁, 그 안에 대온실 있는 거 아시죠? 그 보수공사입니다.”
밑줄을 긋듯 그가 힘주어 대답했다. 모처럼 큰 공사를 맡아서 담당자들이 기대하고 있다고. 이런 대공사와 함께 온 걸 보면 영두씨가 운이 좋은 것 같다고.
하지만 나는 창경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주 축축하고 차가운 이불에 덮인 것처럼 마음이 서늘해졌다. 내가 10대 시절을 보낸 곳이 창덕궁 담장을 따라 형성된 서울의 동네, 원서동이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떨어져내리면 더 짙고 선명해지던 검은 기와들의 윤기가 생각났고, 하숙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 당시 3333번 마을버스를 타고 안국역과 빨래터와 정독도서관을 하염없이 돌던 열네 살 때의 막막함이 또렷이 떠올랐다.
빨래터는 실제 정류장 이름이었고 궁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이 있는 곳이었다. 여름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동네 고양이들도 목을 축이며 빨래터 수문을 통해 창덕궁을 드나들곤 했다. 비탈을 내려가보면 빨래터 물길은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걸어갈 만한 지하 통로로 이어졌다. 어린 나는 이 물은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했고, 그것이 한강으로 강화로, 석모도의 서해바다로 흐르는지를 생각했다.
뜻밖의 장소가 나와 망설여진 나는 기대보다 적은 작업비를 핑계로 들더라도 면접을 이만 끝내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소목수는 “차차 배우시겠지만 그래도 요런 사전 정도는 가지고 계셔야겠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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