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우리는 함께 쓴다
그저 바라만 본다고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인도 작가·아시아 최초 노벨상 수상자
무엇을 하든지 과거에 발목을 잡히지 말라!
─ 로버트 A. 하인라인,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저자
2023년 새해 첫날 오후, 나는 이제 열한 살이 된 딸 디야와 함께 짧은 글짓기를 해보기로 했다. 내가 부엌 조리대에 노트북을 올려놓자, 이야기의 첫머리를 구상하던 디야가 이내 타이핑을 시작했다. 우리의 이야기 속 주인공은 용감한 인플루언서였다. 디야는 그녀의 이름을 서맨사라고 지었다. 서맨사는 지금 무인도에 갇혔다. 글을 써내려가는 디야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우리의 이야기가 공상 과학 소설의 형태를 갖춰나갈 즈음, 혹은 우리가 가상의 세계로 들어서기 시작할 즈음, 디야가 가상세계 속 주인공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서맨사는 곧바로 대답했다. 우리는 그녀의 대답을 채팅창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디야 그리고 살만, 안녕. 난 서맨사라고 해. 지금 너희가 쓰고 있는 모험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워. 전형적인 옛날 무인도 이야기를 현대판으로 바꿔놓았군!”
디야는 채팅창에 이렇게 입력했다. “무인도 생활은 어때요?”
서맨사가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모험이 펼쳐지고 있어. 나는 여기서 일상적인 편의 도구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거든. 그리고 지금껏 알지 못했던 내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중이야!”
디야가 물었다. “어떤 재능이요?”
서맨사는 답했다. “가장 먼저 야자나무 가지와 잎으로 임시 오두막을 짓는 법을 배웠어. 그리고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고 나뭇가지와 마른 잎으로 불을 피울 줄도 알게 되었지!”
디야는 숨도 쉬지 않고 이렇게 썼다. “스카프로 해먹을 한번 만들어봐요.”
서맨사가 말했다. “스카프로? 그건 안 돼! 이건 명품이거든. 바로 찢어질 거야. 내가 등장하는 이 이야기를 계속 함께 써보는 건 어때?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나는 말했다. “서맨사 말대로 해보자.”
디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화면을 바라보며 이렇게 썼다. “서맨사의 제일 친한 친구인 에밀 리가 돛단배를 타고 갑자기 등장하면 어떨까요? 서맨사를 구하러 무인도에 온 거죠.”
서맨사는 “좋았어!”라고 말하고는 다음 이야기를 직접 써내려갔다. “서맨사는 가장 친한 친구인 에밀 리가 작은 배를 타고 무인도로 다가오는 걸 보고도 믿을 수 없었어. 그녀는 에밀리를 향해 미친 듯이 팔을 흔들었어. 배가 해안에 닿자 서맨사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어. 어서 빨리 그 섬에서 겪은 일들을 들려주고 싶었고, 에밀 리가 어떻게 자기를 찾으러 왔는지 듣고 싶어 안달이 났거든. 좋아. 디야와 살, 다시 너희 차례야! 이제 두 문장을 써 봐. 둘의 만남이 어땠는지 상상해보자고.”
정리를 하자면, 나는 열한 살짜리 딸과 함께 가상 캐릭터와 실제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사실 이 상황은 미국 공상 과학 소설가인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이 그려낸 이야기만큼이나 당혹스러웠다. 내가 아는 세상이 갑자기 낯선 현실로 바뀌어버린 듯했다.
이제 우리는 그리고 지구에 사는 모두는, 더 이상 이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제안
우리가 이 믿기 힘든 상황에 이르게 된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내 사촌동생 나디아는 수학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나디아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내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헤지펀드 분석가로도 일했으니 메시지나 전화를 이용해 원격으로 개인 교습을 해주겠다고 말이다. 실제로 나디아는 이 개인 교습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나디아에게 무료로 수학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소문이 친척들 사이에서 퍼졌다. 결국 1년 만에 나는 10명 남짓한 사촌동생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개인 교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사촌동생들을 위해 웹을 기반으로 한 수학 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이 무엇을 공부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고, 동생들은 새로운 내용을 익히면서 각자 상황에 맞게 학습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나는 웹사이트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다. 바로 ‘칸 아카데미Khan Academy’였다. 나는 동생들을 가르치면서 일대일 교습의 장점을 알게 되었고, 그 플랫폼을 확장해서 그들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수천 혹은 수백만 명의 학생에게 개인 교습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는 한 친구의 조언에 따라 기존 프로그램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강의를 녹화하여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 2009년이 되자, 학습에 도움이 필요한 새로운 학생들이 매월 5만 명씩 우리 사이트에 가입했다. 나는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집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칸 아카데미를 개인 교습을 받을 수 있는 채널로 여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현재 칸 아카데미는 비영리단체로서 직원 수가 250명이 넘고, 전 세계 40개 이상의 언어를 통해 1억 5000만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의 사명은 모든 이에게 세계적인 수준의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며, 개인 맞춤형 학습 프로그램을 전 세계로 확장하는 것이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
나는 오랫동안 칸 아카데미가 전 세계 모든 학생을 위한 개인교사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로 기능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 꿈이 단지 맞춤형 강의 프로그램의 규모를 확장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칸 아카데미를 설립하기 이미 오래전에 실행한 수십 건의 연구 결과는그리고 우리의 직관적인 생각은 학생 개개인의 학습 속도를 고려하고 학생 모두가 특정 과목에서 A 학점을 받도록 할 때다시 말해, 완전학습(mastery learning, 낙제생이 없도록 하는 교육 방식)을 실현할 때, 학생들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현재 상황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30명 정도의 학생으로 구성된 실제 교실에서는 상당수 학생이 완전학습에 도달하지 못했어도 그냥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물론 모든 학생에게 열정적이고 언제나 접근 가능한 개인교사를 붙여준다는 것은 비용 측면에서 비현실적인 생각이다. 여기서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은 기술을 활용하는 것이다. 나는 AI 기술이 언젠가 그 퍼즐의 중요한 조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일선 교사들이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성배와 같은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나만의 환상은 아니다. 공상 과학 작가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은 소설 《다이아몬드 시대The Diamond Age》에서, 기술이 교육에 미칠 잠재적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스티븐슨은 AI 기술을 활용한 대화식 교과서와 ‘젊은 여성의 삽화 입문서A Young Lady’s Illustrated Primer’라는 앱으로 학생들에게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는 미래 세상을 그려낸다. 그리고 올슨 스콧 카드Orson Scott Card는 소설 《엔더의 게임Ender’s Game》에서, 제인이라는 AI 개인교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전략적 사고와 의사결정 기술을 가르치고 평가하는 배틀 스쿨을 묘사한다. 또한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는 단편 소설 《잃어버린 즐거움The Fun They Had》에서 첨단 기술로 교육 프로그램을 혁신적으로 개선함으로써 맞춤형 학습의 질을 높이고 학생들에게 맞춤형 지도와 로봇 교사를 제공하는 미래 학교를 그린다. 이러한 공상 과학 소설들은 대단히 현실적인 혁신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는다. 애플 공동창업자인 고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1984년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자전거가 우리의 신체 능력을 10배 높여주는 것처럼, 앞으로 컴퓨터가 생각을 위한 자전거로 기능하면서 우리의 사고 역량과 지식, 창조성을 높여줄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컴퓨터를 활용해서 교육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주장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공상 과학 소설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컴퓨터가 결국에는 우리가 지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따라 하는 세상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이러한 AI 비전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60년 넘게 연구해오고 있다. 1962년에는 로버트 닐리Robert Nealey라는 체커checker, 체스판에 말을 놓고 움직여 상대방 말을 모두 따먹으면 이기는 게임 챔피언과 IBM 7094 컴퓨터가 체커 대결을 벌였다. 승자는 컴퓨터였다. 그로부터 몇 년 전인 1957년에는 심리학자 프랭크 로젠블랫Frank Rosenblatt이 ‘퍼셉트론Perceptron’이라는 것을 개발했다. 이는 최초의 인공 신경 네트워크로서 특정 과제를 수행하도록 훈련된 신경과 시냅스의 집합으로 이뤄진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다. 초창기 AI 분야에서 이러한 혁신이 등장하고 수십 년이 흘러서는 지렁이나 곤충의 두뇌만큼 복잡한 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는 연산 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네트워크를 훈련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데이터도 제한적이나마 갖추게 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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